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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크기
정치의 크기
  • 문성훈 편집기획위원/ 서울여대·현대철학
  • 승인 2015.05.1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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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문성훈 편집기획위원/ 서울여대·현대철학

성완종 리스트로 온 나라가 들끓더니 지난 4·29 재보선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처음에는 잘못한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명시되며 여당이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어느 틈엔가 누구만의 잘못이 아니라 모두의 잘못이 되더니, 결국 아무의 잘못도 아닌 것이 돼 버렸다. 그리고 선거는 누구누구의 뻔한 승리로 돌아갔다.

교과서 식으로 말하면 대의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유지된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국민의 대표가 국가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선거는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정치인의 성공 역시 선거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누가 선거에서 이기고, 또 그래야 할까. 아마도 그것은‘정치의 크기’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 큰 정치를 할수록 선거에 이길 가능성이 커지고, 반대로 정치의 크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선거에 패배할 가능성이 큰 것은 아닐까.

4·29 재보선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큰 정치가 아닌 작은 정치다. 자신의 정치생명을 위해 출마한 사람도 있고, 해산된 정당의 명예를 위해, 아니면 계파의 이익이나 지역 세력화를 위해 출마한 사람도 있다. 물론 지역 발전, 야권 심판, 정권 심판 등 갖가지 구호가 등장했지만, 후보자가 추구하는 정치의 크기는 아무리 커도 지역적 차원에 불과했다. 그것도 지역주의의 피해자이자, 그렇게도 지역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한 정치지도자의 이름을 들먹이며 말이다.

왜 이렇게 정치의 크기가 작은 것일까. 왜 국민 전체를 아우르는 큰 정치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재보선이란 소규모 선거의 특성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총선이라고 해 봤자 별반 다를 것도 없고, 대선조차도 진영 싸움으로 그치고 마니까 말이다. 그람시는 계급투쟁에서의 승리는 한 계급이 자신을 얼마나 보편계급으로 승화시키느냐에 달려있다고 봤다. 이것이 정치의 크기다. 자기 집단의 이익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작은 정치로는 상대방을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정치가 작아진 이유가 있을까. 혹 그것은 지금의 상황이 큰 정치적 의제가 등장할 상황이 아니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다. 대한민국이 복지국가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사회적 양극화가 극에 달해 있는 오늘날 큰 정치적 의제가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오히려 문제는 정치인들이 전 국민을 아우르는 큰 정치적 의제를 제시하며 큰 정치를 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건 또 왜 그럴까. 아마도 그 이유는 정치인들이 정작 자신을 뽑아준 국민이 아니라 당권을 보고 정치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선거가 기성 정당이 만든 선거 프레임 속에서 치러지면 공천이나 의제 모두 이 속에서 결정된다.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아무런 관심 가는 의제가 없어도 유권자는 별 다른 대안이 없는 한 이 프레임 안에서 투표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 공천이 바로 당선으로 이어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러면 정치인은 국민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공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당권의 눈치를 본다. 그리고 당권 자체는 누가 장악하든 선거 프레임이 유지되는 한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는다.

이렇게 정치인의 시선을 정당 외부의 국민이 아니라 정당 내부의 당권으로 향하게 하는 악순환은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그것은 정당 자체의 각성을 통해 가능할까. 아니면 기존의 선거 프레임에 도전하는 새로운 선택에 의해 가능할까. 과연 국민이라는 보편이익 속에 정치를 위치시키는 큰 정치가 오늘날에는 불가능한 것일까.

 

문성훈 편집기획위원/ 서울여대·현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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