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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가면 ‘인문학 枯死’ … “융합 이유로 통폐합 안 돼”
이대로 가면 ‘인문학 枯死’ … “융합 이유로 통폐합 안 돼”
  • 권형진 기자
  • 승인 2015.03.30 14: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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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진흥 종합 심포지엄에서 쓴소리 쏟아낸 인문학자들

“요즘 학회에 가면 30·40대가 없다. 대학이라는 인문학적 지식의 발전소가 가동되지 않는다면 대중 인문학조차 소멸될 가능성이 높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상태에서 융합에 집중할 경우 실패할 확률이 높다.”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은 지난 24일 서강대에서 ‘인문학 진흥방안 모색을 위한 종합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교육부는 인문학 진흥 방안에 대한 학계의 의견을 듣기 위해 지난 두 달 동안 한 차례의 심포지엄과 3차례의 권역별 토론회를 개최했으며 상반기 안에 인문학 진흥 종합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사진 권형진 기자

 

정부는 산업 수요 중심의 학과 개편과 정원 조정을 압박하고, 이를 빌미로 대학은 ‘돈 안 되는’ 학과 통폐합을 밀어붙이려는 현실을 인문학자들이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지난 24일 서강대에서 연 ‘인문학 진흥방안 모색을 위한 종합 심포지엄’에서 김혜숙 이화여대 교수(철학과)는 “교육부와 대학 당국의 일방통행식 대학 구조조정은 인문학과 인문대학의 황폐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 교수는 90여개 학회가 참여하고 있는 한국인문학총연합회(이하 인문총) 초대 대표회장을 지냈다.

김 회장은 “중앙대와 같은 방향의 변화는 기존 인문대학의 해체를 초래할 것”이라며 “학문 기반은 한 번 무너지게 되면 회복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에 구조조정이 건실한 인문대학과 인문학 연구의 기반을 무너뜨려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학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 속에 교육과정의 변화가 주체적으로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며 “교육부는 이러한 공론의 장을 만들도록 장려해 불필요한 갈등으로 인한 낭비를 줄이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강영안 서강대 명예교수(철학)는 “대학은 인문학 전임교수를 충분히 뽑지 않기 시작한지 오래됐고, 강의교수, 연구교수와 같은 변형된 형태의 교수 채용을 도입하면서 일종의 계급 제도를 만들고 말았다”며 “인문학 학회에 가면 30·40대가 없다. 10년만 지나면 인문학자가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류병래 충남대 인문대학장(전국국공립인문대학장협의회장, 언어학과)은 한 지역 국립대에서 2008년 이후 6년간 교수가 22명 늘었는데도 인문학 교수는 14명 준 사례를 들었다. 그는 “이대로 가다가는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의 고사’가 눈에 보이듯 뻔하다. 대학 안에서 인문학과 인문대학이 살아남지 못한다면 대학 밖의 인문학 강연 열풍도 머지않아 사그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인문학자들은 대학당국이 학과 통폐합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융합’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내놓았다. 김혜숙 교수는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상태에서 융합에 집중하는 경우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다. 건실한 인문학자들이 클 수 있는 연구와 교육의 일차적 바탕은 굳건히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위에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다양한 인문 연구,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인문학을 기초학문으로 간주해 기초과학과 함께 국가가 육성해야 하며 ‘인문기본법 제정’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류병래 학장은 이를 ‘대들보론’에 비유했다. “통합전공이나 융합전공은 대들보에 해당하기에 기둥이 제자리를 잡지않고 가운데로 움직여버리면 대들보도 무너지고 집도 무너진다.” 류 학장은 “융·복합을 학과 통폐합의 근거로 세워서는 안 될 일”이라며 “통합전공이나 융합전공은 학과는 그대로 두고 하버드대처럼 ‘기존 전공과목의 조합’으로 ‘새로운 전공을 인증’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날 심포지엄에 청중으로 참석한 위행복 한양대 교수(중국학과)의 어조는 더 강했다. 위 교수는 인문총 제2대 대표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인문학이 발전하려면 폭과 깊이가 있어야 하는데 융합을 잘 못하면 깊이를 포기해야 하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며 “인문학에서 학과 해체는 잘못하면 인문학의 기반을 통째로 무너뜨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취업률을 대학평가나 학과평가의 주요 잣대로 삼는 정책 전환도 촉구했다. 류병래 학장은 “교육부가 주요 평가기준으로 삼고 있는 취업률과 정량적 연구실적에서 인문학은 이공계에 밀릴 수밖에 없고, 대학은 재정지원을 받는 데 유리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투자를 하지 않으면서 대학 안에서 인문학은 죽어가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류 학장은 인문학 진흥을 위해서는 취업률 대신 ‘기초학문 분야 투자 비율’을 평가하자고 제안했다. 교육부는 이번 심포지엄을 비롯해 그동안 제시된 학계의 다양한 의견과 제언을 종합해 6월 안에 인문학 진흥 종합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권형진 기자 jinny@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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