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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를 다시 생각한다
‘안티고네’를 다시 생각한다
  • 방민호 편집기획위원/ 서울대·국어국문학과
  • 승인 2015.02.02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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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방민호 편집기획위원/ 서울대·국어국문학과

방민호 편집기획위원/ 서울대·국어국문학과
소포클레스의 비극 중에 『안티고네』가 있다. 너무나 잘 알려진 비극 『오이디푸스』의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자기 두 눈을 스스로 멀게 하고 정처 없는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이 나라의 왕위를 물려받는 것은 삼촌인 크레온인데, 이는 안티고네의 두 오빠들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가 왕위를 두고 다투다 서로의 칼에 찔려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안티고네의 새로운 비극은 이로부터 시작된다. 크레온은 이 쌍둥이 형제 가운데 에테오클레스는 후히 장사를 지내준 반면 폴뤼네이케스는 땅에 묻히지 못하도록, 영원한 저주에 시달리도록 하며, 아무도 이 명령을 거역하지 말라 한다. 왕의 명을 거스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목숨을 내거는 일이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죽음을 무릅쓰고 오빠의 시신을 땅에 묻어준다. 필자가 기억하기로는, 살아서의 법, 곧 권력이 죽은 자의 세계까지 침범할 수는 없노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비극으로서 안티고네가 의미심장한 것은 그것이 자연의 법과 세속의 법을 대비시키고 후자에 대한 전자의 우선권, 우월성을 주장하는 데 있다. 즉, 이 비극은 왕명을 거역한 안티고네가 가혹한 형벌을 받은 끝에 자결해 버리고 크레온 역시 안티고네를 사랑한 자신의 아들 하이몬이 자결해 버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자신의 왕으로서의 권력의 힘을 과신한 크레온은 결국 그것을 능가하는 자연의 힘의 복수를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이다.

죽은 자는 땅에 묻어라. 이것이 비극 『안티고네』의 전언이었던 바, 이 메시지가 현대의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크고도 깊다. 이 현대처럼 산 자들의 힘을 숭상하던 시대가 있었던가. 현대전쟁은 자기 이익을 위해 적들을 무자비하게 대량 살상하는데, 그것은 마치 자신들의 삶이 이 지상에서 영원하기라도 할 것처럼 여기는 것 같다.

비단 전쟁뿐이랴. 현대의 권력자들, 지배계급들, 부유층들은 자칫 물신주의적 환상에 침닉되기 쉽고, 또 어리석게도 번번이 그와 같은 함정에 빠져들곤 한다. 자신들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그 힘을 드러내는 데 온 시간과 정력을 다 바치고,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 세상도 끝나버린 것 같은 허무를 맛본다. 권력을 잃어버린 이, 재산을 잃어버린 이가 종종 스스로 생명을 버림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현세의 힘과 영화도 불과 100년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 제 아무리 대단한 쾌락도 육신이 썩어진 후에까지 지속될 리 만무하며, 그 어떤 물질적 재부도 결국에 자기가 짊어지고 갈 수는 없다. 그 중 오래간다는 명성이라는 것조차 천 년, 이천 년을 견디기 어려운 것을. 반면에 악행과 어리석음으로 현세의 단맛을 본 이들에게 후세인들은 가혹한 판정을 내리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필자는 가끔 우리 한국 사람들이 그럼에도 지독히 현세주의적이라고 생각되곤 한다. 살아서의 단 맛에 취하기로는 아래위가 없고, 또 지식인들도 이에 약하디 약할 뿐 아니라,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조차 이 현세주의에 물들 만큼 물들어 있음을 자인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모든 갈등과 투쟁이 더욱 격렬하고, 또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그래서, 우리들의 생활과 이를 조율하는 원리들, 절차들, 제도들에 삶 너머의 원리가 더욱 깊이 스며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혼상제와 세시풍속들은 지금보다 더 철저히 상기돼야 하며, 종교적 의식들은 훨씬 더 근본적인 의미를 간직하고 계승될 필요가 있다.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이 모든 것들은 형편없이 찌그러지고 왜곡되고 누추하게 격하돼 있다. 아마도 동양 삼국을 비교해 봐도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권력과 부와 명예가 덧없는 살아서의 궁전에 지나지 않는다는 믿음이 사회 전체적으로 더 깊이 인식돼야 한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것들을 더욱 섬세하게 분유하려는 노력이 경주될 수 있을 것이며, 우리들의 삶이 그로써 참된 구원을 향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죽음만이 이 현세의 고통을 끝맺도록 해주겠지만 말이다.

방민호 편집기획위원/ 서울대·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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