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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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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향준 전남대 BK21박사후연구원·철학
  • 승인 2015.01.27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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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역사 현실에 대한 유학자의 책임의식은 성리학 형성기에 활약했던 두 사람의 유명한 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張載는 자신들의 학문이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백성을 위해 삶의 방도를 마련하며, 옛 성인을 위해 끊어진 학문을 잇고, 미래를 위해 태평성대를 열어야 한다”라고 했다. 한편, 范仲淹은 「악양루기」에서 유학자란 “온 세상이 근심하기에 앞서서 누구보다 먼저 근심하고, 온 세상이 즐거워한 다음에야 자신도 즐거워한다”라고 말했다. 말은 고상하게 했지만 범중엄은 자신의 선언이 갖는 비현실성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런 사람은 좀처럼 보기 드물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유학 전통에서는 이러한 소명의식은 자취를 감췄다. 가장 쉽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역사적 상황의 변동이다. 유학이 관학의 지위를 상실했던 봉건적 국가체제의 몰락과 더불어 유학자들의 국가와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은 불필요한 것이 됐다고 말하는 것이 편리한 설명이다. 그런데 이 설명은 아직 말하지 않는 내용이 더 있다.


문화적 관행들의 DNA라고 할 수 있는 밈(meme)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이미 발현된 유전자가 갑작스럽게 사라진다는 유전적 단절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살아남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를 상실한 책임의식이 기생할 수 있는 공간이 어디에 있는지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어법 속에 답이 포함돼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애초에 ‘국’과 ‘가’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질적인 조합인 ‘국가는 가족’이라는 은유를 통해 나타난 것이다. 하나의 은유가 그 생명력을 다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대안적 현상은 크게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는 근원 영역이 또 다른 표적 영역을 선택해서 대안적 결합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국가는 가족’이 ‘직장은 가족’으로 변화하는 것이 그 사례다. 다른 하나는 개별 은유 자체가 문자 그대로 생명력을 다하고 화석화 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 국가나 직장 같은 표적 영역은 사라지지만, 근원 영역에 해당하는 가족은 살아남는다. 즉, 은유가 해체된다는 것은 개념의 의미가 은유의 근원 영역으로 회귀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국가는 사라지지만 가족은 남는다.
하지만 공동체의 범위가 가족으로 환원되고 나면 그 의미는 급격한 축소를 겪는다. 가족은 해당 가족의 평안이라는 이념을 제외하고 다른 어떤 것을 자신의 이념으로 가져야 할 타당한 이유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가족의 의미가 이렇게 생존과 생물학적인 차원으로 국한되고 나면 범중엄이나 장재와 같은 발상은 그 싹을 발견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거꾸로 갔던 것이다. 王直은 범중엄의 선언에 “다른 사람의 근심을 근심하고, 그의 근심을 없애기를 원해서,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만든 다음에야 그들과 함께 즐거움을 누리는 이라면, 이런 사람이 어떻게 小丈夫일 수 있겠는가!”라고 부연했다. 아예 장재는 가족의 범위를 사회와 국가를 넘어 세계 전체로 확장해서 “하늘을 아버지라 부르고 땅을 어머니라 부른다”라고 선언했다.
한국에서 이러한 유학자들의 소명의식이 마지막으로 비장미를 드러내며 발현된 적이 있었다. 1910년 56세의 유학자 黃玹은 일제의 식민지배라는 역사적 변동을 목격하고 자신의 무능을 자책하며 목숨을 끊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絶命詩 4수를 남겼다. 그 가운데 세 번째 시는 역사의 현실과 글자의 무게를 감당해야 할 사람의 운명이 겪는 곤란함을 네 구절로 압축하고 있다.

짐승은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鳥獸哀鳴海岳嚬)
무궁화 세상 이미 망해 버렸구나(槿花世界已淪)
가을 불빛 아래 책을 덮고 돌아보면(秋燈掩卷懷千古)
인간 세상 지식인 노릇 힘들기도 하여라(難作人間識字人)

황현은 ‘내가 아는 글자의 무게는 내 목숨과 비교해서 어느 것이 더 무거운가’라고 물었다고 볼 수 있다. 識字人이란 자기 인식의 무게 정도는 가늠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탄식은 이런 우활한 질문을 낳는다.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도대체 우리에게는 몇 개의 목숨이 더 있어야 식자인의 책임을 그나마 할 수 있을 것인가.


 

 

 


이향준 전남대 BK21박사후연구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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