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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대출 도서 목록의 역설
도서관 대출 도서 목록의 역설
  • 조성남 논설위원/이화여대·사회학
  • 승인 2015.01.1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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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조성남 논설위원/이화여대·사회학

 

▲ 조성남 논설위원
지난 한 해 대학생들은 어떤 책을 읽었을까. 이런 질문은 대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생각일 것이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이 제공하는‘많이 빌려 본 책 목록’(2014.1.1~2014.12.31) 1위에서 20위까지를 눈여겨봤다. 『에우리피데스』,『총,균,쇠』,『아이스퀼로스 비극』, 『감시와 처벌』,『정의란 무엇인가?』,『이기적 유전자』,『파우스트』,『서양사 강의』등 납득할만한 대출 목록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1위에서 20위까지 많이 빌려 본 책 목록에 포함된 국내 저자의 책이었다. 『서양사 강의』를 비롯해서 6권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교재나 부교재로 활용됐음직한 책이 4권, 소설이 1권이었다. 내친김에 100위까지 살펴봤더니 국내 저자의 책은 모두 31권으로 검색됐다. 이 가운데 학술·교양 서적이 16권, 소설이 8권, 교재가 4권, 기타 3권으로 나타났다.

2013년도는 어떠했는지 궁금해서 다시 뒤져봤다. 1위에서 20위까지의 책 가운데 5권의 책이 국내 저자의 것이었다. 이 가운데 4권은 소설이었다. 2012년도는 6권이 올라 있고, 소설이 4권을 차지했다. 이 간단한 지표는 무엇을 말해줄까.

이쯤에서 다른 자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가 쓴 『한국의 출판기획자』라는 책의 한 대목이었다. 한국 출판은 지난 10년 동안“새로운 기획이 아니라 선인세 경쟁과 저자 캐스팅에 열을 올리고 점유율 싸움”만 했다고 회고한 부분이다. 선인세, 저자 캐스팅, 점유율 싸움이란 활자가 쉽게 눈에 띄었다. 출판이 막다른 벽에 부딪쳤다는 진단이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의 데이터와 한 중견 출판인의 회고가 겹쳐지는 순간, 요즘 책이 안 팔린다는 말, 출판이 어렵다는 말의 실체가 어렴풋하게 짐작되는 것 같았다.

출판에 눈에 어두운 필자이므로‘출판시장’문제보다, 대학 안의 문제를 우선 생각하게 됐다. 필자를 포함해서 주변 동료나 학계의 선후배 교수들의 분주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언제부터인지 교수업적평가에 다들 허겁지겁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등재학술지, 등재후보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업적이 평가되고, 또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다 보니 저서다운 저서를 집필하는 일은 저만치 밀려나게 됐다.

서울대생들의 대출 도서 목록에 국내 저자의 책이 겨우 30% 정도 차지하는 것도 이런 사정과 관련 있지 않겠냐고 말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결국 좋은 국내 저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말인데, 대학생들이 자신의 스승, 지식과 지혜를 전수하는 선생의 책을 접하지 못하는 것은 크나큰 불행일지도 모른다.

모국어로 펼치는 유려한 사고와 사색, 성찰과 고민의 언어는 교수들이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전수하는 지식 못지않게 중요한 지적 자극이 될 수 있다. 靑出於藍이란 말이 있듯, 스승과 선생의 책에서 영향을 받고, 그것을 뛰어 넘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겠다는 열정의 자극이 결핍되는 분위기를 우리 교수들이 먼저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부끄러워진다.

책은 단시간에 만들어질 수 없다. 건전하고 안목 깊은 출판사들이 있어야 하고, 그네들과 지적 소통이 가능한 저자층이 두터워야 비로소 책이 탄생한다고 알고 있다. 나는 뜨거운 열정을 지니고 지식의 교두보인 저서의 집필에 도전했던가. 내 손으로 만들어진 책을 교재나 부교재로 활용함으로써 학생들에게 과감한 지적 자극을 제공했던가. 이러한 결여와 결핍, 부재를 논문 중심의 업적평가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2015년 을미년에는 교수들의 저서가 더 단단해지고 많아져서, 어느 대학이든 대출 도서 목록에서 더 많이 반짝거렸으면 좋겠다.

조성남 논설위원/이화여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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