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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위계질서와 텍스트의 시각화
문자의 위계질서와 텍스트의 시각화
  • 장지연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HK 조교수
  • 승인 2014.11.04 16: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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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어 필사본은 문자의 위계질서와 텍스트의 시각화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논문을 쓰거나 보고서를 작성할 때 우리는 모두 문자의 위계질서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제목은 진한 고딕체 16포인트로 하고 본문 내의 소제목은 신명조체 12포인트를 사용하며, 본문 에는 10포인트 크기의 바탕체를 사용하는 등등의 관례를 따른다. 필요에 따라 본문 텍스트 내에서도 글자를 진하게 하거나 기울이거나 글자에 밑줄을 긋기도 한다. 다양한 종류의 폰트를 적절한 크기로 사용해 문자와 페이지 레이아웃의 시각적 효과를 최대화하는 것이다. 이와 견줄 만한 방식의 텍스트 레이아웃과 문자 시각화의 전통이 동양에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문자기록에 적용되는 텍스트의 시각화는, 한글을 사용한다는 차이점을 제외하고는 서구의 문자기록 전통을 따른 것이다. 한글의 글자를 강조할 때 방점을 사용하기 보다는 밑줄을 긋거나 글자를 더 진하고 굵게 만드는 것에 익숙한 사실만 보더라도 그렇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어떤 연유로 이렇게 텍스트를 시각화하는 방식들이 생겨나게 됐는지를 이해하는 일에는 긴 역사를 훑어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문자의 위계질서를 통한 텍스트의 시각화는 고·중세 라틴어 필사본에서도 이미 적극적으로 시도되던 일이었다. 텍스트의 제목은 장엄한 대문자체(Capitalis)로, 텍스트의 도입부 첫 번째 줄은 ‘Unciales’라 불리는 문체로, 뒤이은 본문은 소문자체로 쓰는 것이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이다(Unciales는 4세기에 형성된 대문자체의 일종으로 직선대신 부드러운 곡선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개별 문자에 대한 강조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졌는데 제일 보편적인 것은 머리글자(initial letter) 장식이다. 장식되는 머리글자의 크기와 장식에 사용되는 색상 및 패턴은 텍스트의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성경에 사용되는 머리글자 장식이 정교함과 화려함에 있어서 제일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일반 텍스트의 경우 강조하고 싶은 단어의 첫 글자나 문장의 첫 글자에 채색을 하곤 했는데, 사용되는 잉크의 색은 지역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주로 붉은색과 파란색, 또는 붉은색과 녹색을 교대로 사용한다. 따로 채색을 하지 않고 텍스트용 잉크로 글자의 빈칸(D, O, Q 등의)을 채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외에도 중요한 문장이나 문단 전체에 다른 색깔의 잉크를 사용하거나 프레임을 씌우는 등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들도 흔히 사용됐다.


현대에는 다양한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들을 활용해 누구나 손쉽게 컴퓨터에서 글을 쓰고 또 이 과정에서 필요한 글자들에 대한 시각화 효과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 배후에는 폰트디자인 작업을 수행하는 전문가들의 노력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전문가들은 우리가 문자의 시각화된 형태를 대하는 태도와 반응에 대한 축적된 지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우리가 특정한 문자 그리고 그 문자의 시각화된 형태를 대할 때 갖게 되는 태도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다양한 맥락에 의해 규정돼 온 것이다. 漢字의 서체들마다 갖고 있는 맥락과 시각적 효과가 다르듯, 우리에게 익숙한 라틴어 문자들도 이러한 문자의 사회사와 문화사를 갖고 있다. 라틴어 문자 기록 방식이 현재 한글의 기록 방식에까지 깊게 개입돼 있는 우리의 일상을 볼 때, 한국의 연구자들도 라틴어 문자의 역사에 한 번쯤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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