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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문장은 왜 대문자로 시작하지 않는 걸까?
라틴어 문장은 왜 대문자로 시작하지 않는 걸까?
  • 장지연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HK 조교수
  • 승인 2014.11.04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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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이야기 26_ Lingua Latina, Lingua Universalis

▲ 라틴어는 기원전 800년경부터 이탈리아 반도 중서부이 타리움 지역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탈리아 최초의 공용어가 됐고, 그 후 로마제국 팽창 및 기독교의 전파와 더불어 중세 유럽의 ‘국제 통용어’가 됐다.

고전 그리스어와 고전 라틴어는 문법구조와 어휘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적어도 첫 수업에서만큼은 라틴어가 그리스어보다 쉽다고 느낀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리스어가 고유의 그리스어 문자를 사용하는 반면 라틴어를 기록하는 문자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영어 알파벳과 같기 때문이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문자를 익혀야하는 어려움은 라틴어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라틴어가 영어 알파벳을 사용한다는 말은 아니다. 영어가 라틴어 알파벳에 기초한 문자 체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라틴어 교재를 훑어본 학생들은 곧 질문한다. 라틴어 텍스트의 문장들이 왜 대문자로 시작하지 않느냐고. 영어에 익숙한 학생들로서는 아주 당연한, 그리고 문자의 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나는 학생들의 질문을 바꾸어 본다. 왜 영어는 문장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시작하는 것일까.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4대 문자(라틴어 알파벳, 한자, 데바나가리, 아랍문자) 가운데 대문자와 소문자를 구분하는 문자는 라틴어 알파벳이 유일하다. 한글에도 대문자와 소문자의 구별은 없다. 글자 크기의 크고 작음은 있어도 다른 글자형태를 사용하는 대문자와 소문자의 이중 체계는 없다. 그렇다면 영어처럼 라틴어 알파벳을 사용하는 문자 체계에는 왜 대문자와 소문자가 따로 있는 것일까. 그리고 또 왜 영어는 문장을 대문자로 시작하지만 고전 라틴어 텍스트는 그렇지 않는 것일까. 이 질문은 라틴어 알파벳의 발전과 라틴어 텍스트 레이아웃의 변천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라틴어 알파벳이 사용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석문으로 초기 라틴어 알파벳은 고대 그리스어 알파벳과 상당히 비슷한 형태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라틴어 알파벳은 점차 변모해 고전 라틴어 시기(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에 이르면, 오늘날 영어를 비롯한 대다수의 유럽어가 사용하는 문자의 형태를 갖게 된다. 고전 라틴어 알파벳은 대문자 ABCDEFGHIKLMNOPQRSTVXYZ와 소문자 abcdefghiklmnopqrstuxyz로 구성된다.

U는 기원상 대문자 V의 소문자형으로 발생한 것으로 V와 U는 하나의 문자로 여겨졌고 두 형태 모두 자음(/w/, 고대 후기에는 /v/)과 모음(/u/)의 음가를 나타냈다. 그러나 중세 라틴어 필사본에서는 대문자 V와 소문자 u의 구분이 사라지고 U와 V 각각의 대문자와 소문자가 혼용됐다. V를 자음을 나타내는 문자로, U를 모음을 나타내는 문자로 구별해 사용하는 것은 라틴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기록하면서 일어난 현상이고, J와 W는 중세에 만들어진 문자로 고전 라틴어 알파벳 체계에 속하지는 않는다.


라틴어는 기원전 800년경부터 이탈리아 반도 중서부의 라티움(Latium) 지역(현재의 Lazio)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로마가 주변 부족들을 정복하고 세력을 넓혀 가게 되면서 이탈리아 최초의 공용어가 됐고, 그 후에는 로마제국의 팽창 및 기독교의 전파와 더불어 중세 유럽의 lingua franca(국제 통용어)로 사용됐다. 라틴어 사용의 확산은 라틴어 알파벳의 보급을 의미하기도 했다. 라틴어에서 발달한 로망스어 계열의 언어들이 라틴어 알파벳을 사용한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게르만어족에 속하는 영어와 켈트어족에 속하는 아일랜드어 사용자들이 각기 기존에 사용하던 룬(rune)문자와 오감(Ogham)문자를 버리고 라틴어 알파벳으로 자신의 언어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라틴어와 라틴어 문자가 중세에 누렸던 권위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다. 영어 기록에 라틴어 문자를 사용하는 대목으로부터 우리가 학교에서 영어 시간에 라틴어 문자를 배우게 된 사연이 비롯되는 셈이다. 그리고 우리가 영어의 표기법으로 배우는 수많은 규정들의 역사적인 연원이 라틴어 문자기록의 역사를 통해 설명돼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비록 라틴어 알파벳 자체가 로마 문명의 산물이기는 해도 다양한 형태의 라틴어 문자체와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텍스트 편집과 정열방식은 고대부터 르네상스시기에 이르기까지 아주 긴 시간동안 다양한 요인에 의해 발전해 온 것이다. 소문자의 발전이 그러하고 띄어쓰기와 문장부호, 문자체 간의 위계질서가 그러하다. 여타 다른 문자와 마찬가지로 라틴어 문자도 처음에는 돌이나 나무같이 딱딱한 재질에 기록됐고, 이런 재료들의 딱딱한 표면에 새기기 쉬운 직선을 많이 사용하는 대문자형이 먼저 발달했다. 이후 보다 부드러운 재질인 파피루스나 양피지가 기록 재료로 사용되면서 각 문자의 획수를 줄여서 빨리 쓸 수 있는 필기체로서의 소문자가 발전했다.


대문자체가 소문자체로 만들어지면서 몇몇의 경우에는 형태의 변화가 크게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예가 A이다. 세 개의 획으로 완성되는 대문자 A에 비해 소문자 a의 초기 형태는 두 개의 직선으로 이뤄진 였다. 이 형태는 기원후 2세기에 왼쪽 직선이 곡선으로 변하면서 의 모습을 띠게 된다. 4세기경부터는 왼쪽 고리의 윗부분이 열리면서 u와 같은 형태가 와 혼용돼 사용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u 형태는 열려있는 고리가 닫히면서 α로 발전했고, 는 a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대문자 A와는 다른 두 개의 소문자 α와 a를 현재 우리가 사용하게 된 것이다.


소문자 s의 사용 역시 재미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문자 S는 세 개의 획으로 완성되는데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내려오는 사선 곡선, 상단부의 커브, 하단부의 커브) 이 형태에서 발전한 원래의 소문자는 이것을 두 획으로 줄인, 하단부의 커브를 없앤 형태인 r이다(소문자 r과 형태가 비슷하지만 r은 r보다 세로획이 짧고 상단부의 가로획의 끝이 물결치는 모양으로 끝나는 차이가 있다). 대문자 형태를 크기만 줄인 s가 고대 말부터 문체에 따라 사용되기는 했으나 중세에 널리 사용됐던 소문자는 일명 ‘long s’라 불리는 r이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고딕체에서 s형 소문자가 처음에는 문자기록의 줄(writing line)에서 맨 끝에만 사용되다가 점차적으로 줄의 안쪽에서도 사용됐고, 결국 중세 말에는 r를 전적으로 대체하게 됐다.


고대의 라틴어 텍스트들은 단어사이의 간격이 없이 모든 문자를 붙여서 쓰는 scriptio continua(연속 기록) 방식으로 기록됐다. 문장의 시작을 알리는 대문자도, 문장의 끝을 나타내는 마침표도 없었다. 대문자와 소문자를 섞어 사용하지도 않아서 텍스트 전체가 다 대문자로 쓰이던지 아니면 다 소문자로 쓰이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처럼 중요한 작품일수록 대문자를 사용해 텍스트의 권위를 드러냈고 교재와 같은 일상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텍스트에는 소문자를 사용했다.


이러한 고대 전통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언어로 라틴어가 전 유럽에 전파되면서 모국어가 라틴어가 아닌 사람들이 라틴어를 배우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scriptio continua로 쓰인 텍스트는 단어와 단어를, 문장과 문장을 올바르게 분리해 읽을 때에만 정확한 의미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중세 초기부터, 특히 구어체 라틴어의 영향이 유럽 남부 지역에 비해 극소했던 아일랜드와 영국을 중심으로 텍스트의 가독성을 높이고 해석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시도됐다. 중요한 단어를 다른 단어보다 크게 쓰는 것, 문장을 대문자로 시작하는 것, 단어 사이의 간격을 띄우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이 일순간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구와 구, 문장과 문장 사이에 간격을 넣는 수준을 넘어 모든 단어를 띄어서 쓰는 관례는 중세 후기에야 보편화됐고, 지역별로, 또 사용하는 서체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의문문을 나타내는 물음표를 비롯한 문장부호의 형태와 용법 역시 시대별, 지역별로 크고 작은 차이를 보이며 발전했다. “howareyouimfinethankyou”가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로 쓰이기까지 무려 천 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린 것이다.


라틴어는 고대에는 로마 제국의 언어로, 중세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종교, 정치, 학문의 언어로 유럽에 군림했고, 현대에는 영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에 차용어와 신조어의 원천으로 남아 숨 쉬는 강한 생명력을 가진 언어다. 그런데 현재 유럽에서 사용되는 대다수 언어의 문자로 사용되고 있으며, 더욱이 제2의 lingua franca로 자리잡은 영어의 알파벳으로 변화해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라틴어 알파벳은 라틴어보다도 훨씬 더 강한 생명력과 영향력을 가진 것이 아닐까 싶다.


장지연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HK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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