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9 00:40 (월)
어떤 실종의 제보
어떤 실종의 제보
  • 교수신문
  • 승인 2014.10.27 17: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비평] 이향준 전남대BK21 박사후연구원·철학

있다가 없어진 것들의 영향은 어지간하면 잘 느껴진다. 하지만 한 가지는 예외적이다. 애초부터 사라진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했던 경우다. 그것이 우리가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그것들이 있었을 때조차 그런 것이 있었나 싶은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하기 때문에, 그것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대해 둔감할 때가 많다. 우리는 가끔 실종의 경험 자체를 실종시킨다.

사실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 때문에 그것들은 늘 실종의 위협에 시달렸다. 그것들은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됐다. 반대의 경우도 그리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손쉽게 그것들을 일종의 타락 상태로 몰고 가곤 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타락이란 그것들을 눈에 보이는 양상으로 변질시키는 데 몰두하는 경향을 가리킨다. 극단적인 경우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데 실패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된다. 가시적으로 돼야만 존재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애초의 전제는 뒤집힌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이라면 처음부터 그것은 보이는 것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지, 보이지 않는 것의 영역으로 들어갔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위험성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의 시각화는 실종과 타락 사이에서 그네를 타곤 했다.

이 이중의 위험은 사실 고전적인 것이다. 禪宗은 손가락에만 시선을 집중하는 수행자의 맹목성을 한탄하면서『指月걧』이란 제목을 들고 나왔다. 동양의 회화 전통은 烘雲托月이라고 불렀던 방식을 통해 이 난관을 돌파했다. 이 기법은 달을 가린 구름을 그리고, 구름의 형태와 먹의 농담 조절을 통해 보이지 않는 달로 주의 집중을 유도한다. 그림 속에서 절대로 달이 드러나지 않지만, 구름에 집중하는 관찰자는 의미론적으로 구름의 이면에 있는 달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떠올린다.

중세 유럽의 회화 전통도 비슷하다. 그림 속의 이미지에 원근감을 배제한 평면성을 일부러 부여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시각 경험에서 어긋나는 이미지의 획일성은 대상을 평면적으로 만들고야 마는 전지적인 신의 시점이 낳은 결과물로 해석됐다. 삶의 내용이 갖는 일차원적인 얄팍함이 바로 신의 무한한 높이에서 파악된 삶의 질성이라는 주장이 그 뒤를 이어 받았다. 따라서 삶의 무의미성을 벗어나 내세로의 이동을 추구하는 것이야 말로 참된 삶의 여정이라는 결론은 별로 신비로울 것도 없는 평면화들의 비밀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대변되는 근대 초기의 화가들은 이런 내밀한 바람과는 달리 거기에서 구성의 빈약함과 내용의 생기 없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실종된 인간의 눈을 도입함으로써 풍부한 원근감의 질성을 되돌릴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준다. 중세 회화에서 인간의 눈이 실종된 사건은 그저 눈의 실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대신해서 신의 눈이 관찰자의 위치에 들어섰기 때문에 실종에 대한 자각이 그렇게 오래도록 잊힐 수 있었다. 따라서 실종이란 단순한 잃어버림이나 상실의 경험이 아니다. 실낙원을 향한 인간의 열정,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 나선「尋牛圖」의 내용 등은 잃어버린 원형을 되찾으려는 인간적 열망을 반영한다. 하지만 이런 구도를 위해서라도 제일 먼저 실종된 사실 그 자체가 자각돼야 한다는 전제가 뒤따른다. 우리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것의 실종을 다른 방식의 현존이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의 현존은 어떤 실종의 부재증명일 수 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제보자」는 이런 점에서 약간 기이해 보인다. 이 영화는 누가 봐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몇 년 전에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일을 허구적으로 재생시킨다. 하나의 은유로서는 그럴 듯하다. 하지만 이 은유는 사실에 가장 가까운 자료를 모아 그것을 재구성해서 상영하려는 시도가 우리의 현실에서 불가능하다는 고백으로도 들린다. 물론 불가능이란 표현은 지나친 말이다. 과거의 이 사건과 깊숙이 연관된 인터넷 신문의 강모 기자가 쓴 영화「제보자」가 말하지 않은 사태의 진실에 대한 기고문 몇 줄을 읽어보면 그렇다. 극장의 큰 스크린과 인테넷 신문의 한 지면의 차이만큼이나 현실과 은유는 어긋난 방식으로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가 현실과 같아야 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영화의 구성에 동원된 은유적 방식의 好괒를 따질 여지는 언제나 충분하다.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어떤 과학적 성취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와 유사한 어떤 것에 대해서도 우리가 열광할 준비가 돼 있다는 사실이 우리 자신에 대해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이다. 나아가 이 성찰이 부재하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망각이다.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 영화의 아이러니다. 영화는 벌어진 일은 제쳐두고 애써 그와 유사한 허구를 구축하려고 한다. 이 때문에 이런 의심이 든다. 이 영화는 정말로 어떤 사회적 망각을 상기시키려는 예술적 시도인 것인가. 아니면 영화 산업과 아이러니의 일시적 동거에 불과한 것인가.

 

이향준 전남대BK21 박사후연구원·철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