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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어를 지켜낸 프레데릭 미스트랄의 펠리브리즈 문학운동
지역어를 지켜낸 프레데릭 미스트랄의 펠리브리즈 문학운동
  • 장니나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HK연구교수
  • 승인 2014.09.16 16: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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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릭스 A. 클레망이 그린 프레데릭 미스트랄의 초상화.
남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역어인 오크어는 1500년을 기준으로 이전은 옥시탄어로 이후는 프로방스어로 불리기도 한다. 다양한 표기로 인해 1290년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는 오크어로 불렀고 14세기 이후로는 라틴어 표현인 옥시탄어로 알려졌다. 이후 19세기에 옥시탄 지역에서는 전통문화보존운동이 있었는데 행정문서에 오크어와 옥시탄어를 동의어로 기록하고 있다.
이 지역의 언어 수호를 위해 지역어로만 문학작품을 남긴 190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레데릭 미스트랄은 오크어를 연구한 언어학자이기도 했다. 그가 주도한 펠리브리즈 운동은 엄밀히 말해 중세 옥시탄문화권의 언어였던 옥시탄어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듯 문학 활동을 통해 지역어를 수호하고자 한 문인들의 활동에서 시작됐다.

많은 프랑스인들이 옥시탄어를 소통하는 언어라기보다는 문학의 언어로 인식하듯 11세기 말엽 최초 음유시인인 기욤 드 푸와투(1071~1127)는 고대 성인들의 순교를 기록했고, 프랑스 남부 음유시인들에 의해 연애를 소재로 한 서정적이고 우아하며 세련된 궁정문학이 번성했다. 이 지역 음유시인들은 귀족의 성에서 시와 노래를 읊고 부르며 경제적인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이교도 근절을 명목으로 북프랑스의 왕들이 남프랑스 귀족에 대항해 일으킨 알비파 원정(1209~1229) 이후로는 유럽의 여러 지역을 두루 편력하면서 옥시탄어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당대 로망제어들 중에서도 위상이 높았던 옥시탄어는 고대 헬레니즘 시대에 통용됐던 공통어를 지칭하는 ‘그리스 코이네’처럼 음유시인들의 動線으로 인해 여러 지역에서 사용하는 공통어로 발전했다는 추정이 있다. 또한 옥시탄어가 현재도 보호되고 있는 지역을 근거로 볼 때 지중해 연안에서 이뤄졌던 무역에서 쓰이던 언어들 간의 우위로 인해 여러 집단의 매개어가 됐다는 가설도 있다.
중세의 옥시탄어로 된 문학작품을 보존해 후세에 물려주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된 번역 사업은 사전편찬으로 이어지고 지역어로 된 문학 활성화에 기여했다. 1854년에는 프레데릭 미스트랄과 여섯 명의 시인들로 구성된 펠리브리즈 협회가 옥시탄어와 오크제어를 수호함으로써 초기의 문학동아리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단체로 거듭났다. 이후 옥시탄어를 가르치는 학교와 연구기관이 생겨나고 문법서가 간행됐다. 1972년에는 옥시탄어 여름대학이 옥시탄어와 문화 보급에 박차를 가했다.
프랑스 옥시탄어 보호단체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서 활동하는 옥시탄어 지역어 운동가들과 국제적으로 연대하기도 했다. 그 결과 옥시탄어는 1998년에는 스페인 카탈란 지역의 발다란에서 공식어로 인정받았고 2007년에는 카탈란 전지역으로 확대됐다. 이탈리아에서는 1999년 국가어로 보호받게 되고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때는 공식어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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