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02:05 (토)
지역 인문학의 위기와 학문 생태계의 파괴
지역 인문학의 위기와 학문 생태계의 파괴
  • 김용규 편집기획위원/ 부산대·영문학과
  • 승인 2014.09.15 11: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딸깍발이] 김용규 편집기획위원/ 부산대·영문학과

▲ 김용규 편집기획위원
2010년 영국 미들섹스대학은 철학 전공을 폐지한 적이 있다. 당시 이 대학의 철학 전공은 영국 내에서 상당히 우수한 수준이었고 교수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명망 있는 이론가들이 여럿 있었다. 철학 전공의 폐지 이유는 철학과를 유지하고 거기에 소요되는 재정적 비용을 다른 곳에 투자한다면 훨씬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으리라는 대학 당국의 계산 때문이었다. 철학이 갖는 역사적 의미나 사회적 가치와는 상관없이 투입 대 산출이라는 효율성에 입각한 신자유주의적 계산법이 전공 폐지에 적용된 것이다. 촘스키, 바디우, 버틀러 등을 비롯한 저명한 지식인들이 이를 항의하는 서한을 학교 측에 전달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의 지역 대학에서도 철학과를 비롯한 인문학과들이 속속 폐과되고 있다. 미들섹스대의 사례와 달리 그 어떤 지식인의 항의는커녕 소리 소문도 없이 폐과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필자가 사는 지역 소재 대학 중에서 철학과가 존재하는 대학은 극소수다. 90년대 말 일부 대학에서 시작된 철학과 폐과는 이제 대세가 돼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런 폐과의 물결은 인문학과 전반으로 밀어닥치고 있다. 지난 봄 있었던 창조한국 사업(CK)은 지방대학의 인문학과 제도의 존폐에 종결자 역할을 했다. 학생 수 감소와 취업률, 그리고 지방대의 생존이라는 명분 앞에서 인문학과들은 앞다퉈 학과 통폐합과 학생정원 감축을 실시했다. 아마 몇 년 뒤에는 우리가 알던 인문대학의 모습을 지역대학에서 찾아보기란 쉽지 않을 듯하다.

문제는 지금 당장은 지역대학이 학과 폐지의 일차적 피해자가 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의 인문학 제도 전반의 생태환경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변화가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지켜볼 일이지만 많은 폐단을 초래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수도권 대학과 지방대학 간의 우열이 고착화해 있고 우수 학생들이 수도권으로 쏠리는 현실에서 지방대학이 쇠퇴해도 수도권 대학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안도할지 모른다.

하지만 제도적 생태계가 파괴된 현실의 영향을 수도권 대학이라고 해서 피할 순 없을 것이다. 가령 연구자의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지방대는 수도권에서 배출된 연구자 중 다수가 직장을 얻어 평생을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는 곳이다. 하지만 앞으로 수도권 대학의 연구자들이 학위를 받고 아무리 뛰어난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지방대에서 자리 잡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받아줄 학과와 전공이 지방대에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사회의 인문학에서 유명 강사들이 등장하고, 좋은 책들이 쏟아지고 있으며, 사회 곳곳에서 대중강좌들이 열리고 있다. 사회의 인문학은 바야흐로 붐을 맞이하고 있다. 이런 붐에 편승해 현 정부는 문화융성 시대를 열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하지만 문화융성을 뒷받침해줄 인문학 제도의 생태적 기반은 급속하게 무너지고 있다. 오히려 사회의 인문학 유행은 그런 위기를 은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회의 인문학이 대학 인문학을 대변하지 않는다. 그 역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회 인문학이 대학의 인문학 없이 존립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공상에 불과하다.

90년대 중반 일본에서는 도쿄대, 교토대를 비롯한 유명 대학들이 근대적 분과학문의 시스템을 해체하고 종합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문화 간, 언어 간, 지역 간 통합을 지향하는 학제 개편에 나섰다. 한국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지방대학이 그 개편의 주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힘은 효율과 수익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생존 논리일 뿐이다. 지금이야말로 인문학자들과 책임 있는 대학 관계자들이 신자유주의적 효율성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인문학의 생태적 순환을 감안하는 인문학 제도 전반에 대한 큰 그림을 다시 구상해야 할 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