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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非世說] 셰바르드나제
[是非世說] 셰바르드나제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4.07.14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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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Eduard Shevardnadze). 좀 까다로운 이름이다. 그렇기에 지금 사람들에게는 좀 생소한 느낌을 주겠지만,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세계의 변화를 주도했던 舊소련의 마지막 외무장관이 바로 그다. 러시아 사람들의 이름은 표기도 그렇지만 발음하기도 어렵다. 셰바르드나제가 처음 세계 외교무대에 등장했을 때 발음이 어려워 혼란이 많았다. 보리스 옐친도 마찬가지였다. 옐친이 고르바초프에 이어 러시아 대통령으로 등극했을 때 우리 언론들은 그의 이름을 ‘옐트신(Yeltsin)’으로 표기했던 게 기억난다.

셰바르드나제 전 소련 외무장관이 우리의 뇌리에 남아있는 것은, 그가 옛 소련 개혁·개방 정책의 설계사로 동서 냉전체제 붕괴에 주도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은 사실상 1985년 셰바르드나제가 외무장관에 발탁되면서 시작됐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그는 고르바초프를 등에 업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 군대를 철수하고, 미국과 역사적인 전략 핵무기 감축협정을 끌어냈다. 동·서독 통일을 지지하면서 베를린 장벽 붕괴에 뒤이은 1990년 독일통일의 막후 협상을 중재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시내트라 독트린’이 나온다. 셰바르드나제의 외교정책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는 “소련은 소련의 길을 갈 테니 너희는 너희의 길을 가라”며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이 견지했던 기존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그의 이 외교정책은 프랭크 시내트라의 인기곡 「마이웨이」에서 착안된 것이란 후문이다. 그래서 그의 이 외교정책이 ‘시내트라 독트린’으로 불린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아찔한 것은 동·서 냉전의 종식과정이다. 세계의 역사를 바꾼 이 과정이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진행됐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아는 사실이다. 까딱 잘못하면 세계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위험한 과정도 있었다. 냉전체제 공산주의의 강력한 한 축이었던 소련의 외무장관으로 이 과정을 주도해나갔던 인물이 바로 셰바르드나제였던 것이다. 셰바르드나제는 한반도와도 인연이 깊다. 1990년 한국과 소련과의 수교의 주역이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북한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양국 간 수교를 반대했다. 그러나 그즈음 평양을 방문해 金日成의 억압적이며 불통적인 태도를 보고 입장을 바꿨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대북포용정책을 골자로 하는 DJ의 ‘햇볕정책’지지자이기도 했다. 또 1983년 소련의 KAL기 격추 당시 외무장관이기도 했다. 그 셰바르드나제가 지난 7일 지병과 노환으로 세상을 떴다. 향년 86세. 그의 타계 소식을 맞아 전 세계가 애도를 표했다. 애도의 표현 속에는 그가 세계의 냉전체제를 끝내고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이 강조되고 있다.

1985년에서 1991년까지의 격변기에서 소련의 외무장관으로 세계의 변화를 주도한 셰바르드나제지만, 말년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1991년 고르바초프의 사임과 함께 외무장관에서 물러난 그는 소비에트연방에서 독립한 조국 조지아로 돌아간다. 1992년 군부의 도움으로 당시 국가원수 지위인 국가평의회 의장에 올랐고, 1995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 조지아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러나 만성적인 경제난에다 친인척의 부정부패,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통치스타일이 신생국 조지아를 가난과 혼란에 빠뜨렸다는 비판 속에 대통령 재직 도중 두 번의 암살 위기를 겪는다. 결국 2003년 11월 총선 부정선거 논란으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자 야당과의 협의 끝에 무력충돌없이 하야를 선언한 후 재야에 묻혀 지내다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가 은둔했던 수도 트빌리시의 私邸는 좀 독특했다. 집안에 무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먼저 지난 2004년 세상을 뜬 아내 나눌리 여사의 무덤이다. 셰바르드나제는 부인을 끔찍이 사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매일 아내를 생각하며 무덤에 꽃을 바쳤다고 한다. 엄혹한 이해관계가 상존하는 국제 외교무대를 주름잡던 그에게 이런 로맨티스트로서의 면모가 있었다니 새삼 놀랍다.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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