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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과 X-선 결정학
월드컵과 X-선 결정학
  • 윤형섭 광주과학기술원 생명과학부 박사과정
  • 승인 2014.06.30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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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윤형섭 광주과학기술원 생명과학부 박사과정

윤형섭 광주과학기술원 생명과학부 박사과정
광주과학기술원에서 구조생물학을 전공으로 연구를 시작한 지 6년여가 지났다. 구조생물학은 단백질, 핵산 또는 이들이 형성하는 복합체 등 생체고분자의 구조와 기능을 토대로 생명현상에 내재된 비밀에 대한 해답을 원자 수준에서 제시하는, 가장 미시적인 생물학 분야 중 하나다. 구조생물학에서 사용되는 구조 규명 기법으로 X-선 결정학, 핵자기공명, 극저온 전자현미경 등이 있는데, 우리 연구실에서는 X-선 결정학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X-선 결정학은 결정의 X-선 회절 패턴을 수집·분석해 획득한 전자밀도 지도를 이용해 구조를 규명하는 방법이다.

현재 지구촌은 2014브라질월드컵으로 열기가 뜨겁다. 개최국이 삼바의 나라 브라질이어서 일까, 다득점 경기가 속출하고 이란-나이지리아전을 제외하면 무득점·무승부 경기가 없을 정도로 화끈하게 진행되고 있다. 방사광 가속기에서 진행될 X-선 회절 실험을 위해 단백질 결정을 준비하는 도중 문득 생각해 봤다. 월드컵 또는 축구와 X-선 결정학.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둘 사이에 연관성을 찾을 수는 없을까.

현대 축구에서는 활발한 포지션 이동을 통해 전술의 다양화를 꾀하지만, 골키퍼를 제외한 10명의 필드 플레이어들은 4-4-2나 4-2-3-1 등 특정 포메이션으로 경기에 나서게 된다. 고분자 결정에서 포메이션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공간군이다. 결정의 가장 큰 특징은 원자의 규칙적 배열인데, 이는 대칭 요소의 조합으로 나타나며 이것을 공간군이라 한다. 탄소로만 이뤄져 있는 흑연·다이아몬드처럼 하나의 물질이 어떤 공간군으로 결정화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물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같은 고분자라도 결정화 조건에 따라 다른 공간군을 가질 수 있고 이에 따라 회절 정도의 차이가 발생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생체고분자는 65개의 공간군을 가질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경기 중 전술상 목적으로 포메이션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한 번 생성된 결정의 공간군이 변화하지는 않는다.

동·하계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과 마찬가지로 월드컵은 4년이라는 긴 주기를 가지며,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서 여러 단계의 지역 예선을 거친다. 한국 대표팀이 8회 연속 본선에 진출하는 동안 1994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서 경기를 전부 치르고도 일본-이라크 최종전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등 순탄치 않은 과정들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생명과학의 어떤 분야에서든 하나의 생명현상에 의문을 갖고 해답의 근처에 도달하기까지 여러 어려움에 봉착하지만, X-선 결정학에서의 최대 난관은 생체고분자의 결정화에 있다. 볼링 핀을 셀로판테이프만 사용해서 세로 방향으로 쌓는 것에 비유할 정도로, 고해상도로 회절 가능한 고분자 결정을 획득하는 것은 어려운 과정이다.

월드컵 본선은 23인의 엔트리로 치른다. 매번 있었던 일이지만 이번 월드컵 최종 엔트리를 선발하는 과정에서도 이른바 ‘엔트으리’로 대변되는 잡음이 있었다. 물론 전술·전략은 코칭스태프에 의해 수립되고 이에 따라 출전 명단이 결정되므로 어떤 선수가 선발되거나 탈락하더라도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생체고분자 결정의 회절 여부는 주로 방사광에서 확인되지만, 그 전에 간단한 회절 실험을 수행하거나 결정의 염색, 자외선 조사 등의 방법으로 옥석을 가려낼 수 있다. 이렇게 선별된 결정으로 실제 회절 실험을 할 때 마치 축구 경기와 같이 희비가 엇갈릴 때가 있지만, 본인의 결정이 회절하지 않더라도 동료가 만든 결정의 고해상도 회절 성공을 축하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향후 방사광에서 필자를 비롯한 모든 구조생물학자들의 실험 성공을, 국가적으로는 월드컵에서 홍명보호의 선전을 기대한다.

윤형섭 광주과학기술원 생명과학부 박사과정
DNA 결합 단백질, NAD 합성 효소 및 신약 개발 표적 단백질에 관한 구조-기능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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