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08:55 (토)
[문화비평] 이제는 희생자의 시선으로 보자
[문화비평] 이제는 희생자의 시선으로 보자
  • 교수
  • 승인 2002.10.0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2-10-05 12:11:19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시사 다큐가 방영되면서, 사람들은 ‘말할 수 없었던 그때’와는 전혀 딴판인 세상에 살고 있음을 실감하게 됐다. 은폐된 국가 폭력의 진실을 공개한다는 것, 국가 폭력에 의해 자행된 희생양 제의의 잔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것. 이 미디어의 정치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역사에 대한 경외심을 자각하게 하고, ‘기억한다는 것’이 역사의 진보에 얼마나 커다란 자산인지를 깨닫게 한다.

놀랍게도 프로의 제목은 이 점을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있다. ‘이제’ 對 ‘그때’, ‘말할 수 있다’ 對 ‘할 수 없었다’, 이 긴장 속에는 ‘진실’ 對 ‘거짓’이라는 이항대립의 축이 놓여 있다. 하지만 좀더 생각해보자. 말할 수 없었던 과거에는 진실이 없었는가. 아니 오히려 ‘그때’의 진실과 ‘이제’의 진실이 뒤바뀐 것은 아닌가. 아니 아니, 오히려 오늘이라는 공간에, ‘그때’에 통용됐던 진실에 더해 또 하나의 진실을 내놓은 것은 아닌가. 오직 하나만이 옳다는 믿음이 흔들리는 세계, 자신의 주장이 아닌 다른 것 속에도 진실이 가능할 수 있다는 열린 인식, 그러한 개방된 사고 경향을 지칭하는 ‘성찰’이라는 용어가 최근 자주 사용되고 있다.

동의대 사건이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게 됐다는 것은 또 하나의 진실을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인방화’였다던 과거의 치명적인 낙인 대신 민주화운동이라는 영예로운 훈장이 부여됐다. 한데 이 사건은 이례적으로 가해자인 국가측의 손실이 상대적으로 컸다는 점에서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다. 안보라는 명분과 민주화라는 명분 사이에서 7명의 경찰이 죽었다. 그렇다면 이때 가해자는 누구인가. 과거 국가는 학생을 살인방화범으로 처벌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면, 이제 국가는 동의대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정당화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이제’ 국가는 이런 방식으로 과거의 추잡한 폭력 전과를 씻으려 한다.

얼마 전 문부식씨는 이런 판정에 대해 비판하면서, ‘이제는 그렇게 말하는 논리에서 벗어나자’고 말한다. 자신의 관점에서 진실의 당위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의 관점에서 말할 때가 ‘이제는’ 됐다는 주장이다. 희생자가 ‘우리’ 자신과 닮은 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희생자의 시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누가 정당성의 고지를 선점하느냐의 문제보다, 사태의 전개에서 희생자를 막을 방도는 없었는가를 물음으로써, 한 사건을 기억해보자는 제안인 것이다.

니체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진리의 세계를 파괴하는 새로운 인간의 도래를 열망했다. 인간 행복을 추구한다던 선이 악을 제거하기 위해 벌이는 거룩한 전쟁은 설사 희생자가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 이런 믿음은 희생자를 최소화하기보다는, 거룩한 전쟁에서의 승리를 최적화하기 위해 행동한다. 이때 그는 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혹은 선의 편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우리’라는 자기 내부의 파시스트와 대결하고 있다.

예수는 선악 이분법의 담지자인 바리사이가 자신과 닮은 자를 찾고자 온 세상을 두루 헤매는 것과 같은 열정을 배우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경계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보다 더 지독한 진리의 십자군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윌리엄 수사의 입을 빌어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조심하라”고 경계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은 사람을 자신과 함께 희생하게 하거나, 때로는 자신보다 먼저 희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예수 자신은 세상의 진리들 틈새에서 희생당한 이의 얼굴로 세상에 왔다. 예수가 신이라고 고백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희생자의 얼굴에서 신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들은 예수의 말은, 바리사이의 진리와는 다른 진리, 곧 희생당한 자를 닮은 하느님을, 그 진리를 따르라는 것이다. 이 다른 진리를 열과 성을 다해 실천하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파시스트를 찾아내기 위한 열정이다. 그것은 희생자의 실어증 걸린 입에서 침묵의 소리를 듣고 재현해내는 열정이다. ‘증언의 정치’는 저들에 의해 왜곡된 우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저들간의 정당성 전쟁에 의해 희생되는 이를 복권시키고 부활시키는 일에도 필요한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