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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 한발 깊어진다는 것
한발 한발 깊어진다는 것
  • 이문주 스위스연방공대 물리학과 박사후 연구원
  • 승인 2014.04.2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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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이문주 스위스연방공대 물리학과 박사후 연구원

이문주 스위스연방공대 물리학과 박사후 연구원
양자 광학(Quantum Optics)이란 빛의 세기가 아주 작을 때, 빛을 알갱이 단위로 볼 때만이 해석 가능한 것을 연구하는 기초학문이다. 대학원생 때 시작해서 이제 이 길로 들어선 지 10년 정도가 됐다. 병아리 신세는 면해서 어떤 연구가 중요한 일인지 아닌지 구분할 정도는 됐지만 여전히 지식과 경험 부족으로 여러 문제에 부딪혔을 때 막막함을 느끼는 경우가 빈번하다.

취리히에서 연구하며 지내던 어느 날, 연구실 친구의 권유로 한 수업을 청강하게 됐다. ‘고급 양자 광학’ 이라는 수업이었는데 아타치 이마몰루라는 교수님의 대학원생 대상의 강의였다. 일반적인 수업과 비슷할 것이라는 내 막연했던 예상과 달리,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수식들을 아무런 노트 없이 분필 한 자루만 가지고 일사천리로 적어 나가시는 데, 말로만 듣던 물리에 대한 아주 깨끗한 이해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수업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단계들의 이해로 될 일이 아니었다. 이 분야와 인접분야를 완벽하게 알고 복잡한 개념들을 수 없이 곱씹었어야 했고 그걸 말로 잘 표현해내는 과정을 몇 번씩 거친 그런 수업이었다.

학부생 시절 역학 시간에 돌이 떨어지는 것을 정확히 수식으로 기술해 내는 것을 보며 물리학이 정말 대단한 학문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이마몰루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며 한 인간이 한 분야를 이렇게 깊게까지 이해할 수 있고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경외감을 느꼈다. 가끔 교수님들이나 동료들과 토론하면서 직관이 깊은 한 두 마디에 깜짝 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분야를 섭렵한 사람으로부터 일방적인 지식의 주입을 받아보니 이것도 정말 감탄스러운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이해가 깊어질 수 있을까? 지난 수 년 간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이다. 나는 천재가 아니고 어려운 문제를 이해하는 데 큰 재능도 없다. 늘 대부분의 것들을 남보다 느리게 이해했고, 안타깝지만 결국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 간 것도 수두룩하다. 주변에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은 널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속도로 이해를 해 나가다가 대체 어느 정도 선에 머무를 지 답답해하던 어느 날, 우연히 만화가 이현세 화백의 ‘천재를 이기는 방법’이라는 짧은 글을 발견하게 됐다. 사람이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보며 느끼는 감정을 적은 글이었는데 여기에 보면 ‘만화는 엉덩이로 그린다’는 말이 나온다. 천재들은 남보다 먼저 앞서 가지만 다른 천재를 만나거나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나면 좌절하고 이 분야를 떠나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만화가가 되려면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매일 스케치북에 10장의 크로키를 하면 된다는 것이다. 10년이면 약 3만 5천장을 그리게 되고 그러면 결국 인간의 모든 행동과 자세를 그려보게 된다는 것이다.

물리학자의 길도 비슷하다. 모르면 더 읽으면 될 일이고, 주변에 더 물으면 될 일이다. 실험이 막히면 한 번 더 실험실에 가서 방법을 찾으면 된다. 여전히 이 분야가 재미있기 때문에 그저 하루하루 게으르지 않게 열심히 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단, 경험상 남들과 토론하면서 늘 많은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혼자 골방에 박혀 있지 않고 자꾸 문제를 도출해내고 토론하는 습관만 잃지 않으면 느리다 하더라도 계속 앞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예전에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시작된 연구를 보며 좋은 인상을 받았었다. 이제 내 눈엔 그런 것 보다는 정말 어려운 문제들을 깊게 파고 들어가서 결국 해결책을 제시해 내는 그런 연구들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그런 연구를 하려면 모든 면에서 이해가 더 깊어져야하고 그러려면 계속 이 길을 한 발 한 발 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느 날 내 앞에도 새로운 발견이라는 선물이 놓여 있지 않을까. 결국 아무 것도 놓여있지 않더라도 흥미를 잃지 않고 평생 한 길을 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 자신에게 큰 만족일 것 같다.

이문주 스위스연방공대 물리학과 박사후 연구원
서울대 물리학부를 나와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를 했다. 스위스 연방공대 물리학과에서 보즈-아인슈타인 응축물질과 공진기의 상호작용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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