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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들과 나쁜 사회
착한 사람들과 나쁜 사회
  • 권경우 문화평론가·광운대 강사
  • 승인 2014.03.24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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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세 모녀가 자신들이 살던 집에서 생을 마감했다. 최근 이러한 가족 동반의 죽음이 빈번해지고 있다. 대개 부모가 어린 자녀를 먼저 ‘살해’하고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린 자녀가 아니라 60대 어머니와 30대 두 딸의 죽음이다. 사람들은 조금 의아해한다. 여성이라 할지라도 세 명의 성인이 왜 살아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오늘날 많은 이들이 힘들더라도 버티고 있는데, 어찌해 버티지 못했을까. 이런 시각에는 어쩌면 그들의 죽음을 ‘경제적 이유’로 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그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전후 사정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는 12년 전에 방광암으로 투병하다 사망했다. 암 투병 과정에서 늘어나는 병원비는 두 딸 명의의 신용카드 사용으로 이어졌다. 그 후 두 딸은 신용불량자가 됐고, 어머니는 식당일을 하면서 가계를 이어갔다. 설상가상 큰 딸은 고혈압과 당뇨를 앓고 있어서 일을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약을 처방받지도 못했다. 작은 딸 역시 신용불량자라는 이유로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간간히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중 작은 딸은 만화가의 꿈을 품고 있었고 공모전 수상을 할 정도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만화가들이 그렇듯이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감당할 수 있는 조건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의 죽음이 사회적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남겨진 유서 때문이었다. 그들의 죽음 곁에 놓인 하얀 봉투에는 현금 70만원과 함께 짧은 유서가 발견됐다. 내용은 네 줄에 불과했다.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들은 한 번도 월세를 밀린 적이 없고, 채무 이자 역시 사건 발생 한 달 전까지는 꼬박꼬박 입금했다. 대략적인 상황만 보더라도 그들의 삶과 일상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두 딸은 가장 푸르른 20대 청춘의 시기를 채무에 시달리는 신용불량자로 살아갔을 것이고, 모르긴 해도 그 사이 친구들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관계는 단절됐을 것이다. 실제로 가계를 책임지고 있던 어머니는 팔을 다친 이후에 식당일을 그만둬야만 했다. 우리는 그녀가 빌라 지하의 두 칸짜리 방에서 느꼈을 절망의 크기를 짐작할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은 절망을 표출하지 않았다. 죽음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분노와는 다른 정결함을 유지했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처럼, 악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시대에 그토록 착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착하기만 했다. 그들은 세상을 원망하거나 대한민국을 욕하거나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들의 착함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지만 더 이상 죄책감이나 수치심이라고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사회에서 그들의 순수함을 어떻게 봐야 할까.

서른 한 글자에 불과한 짧은 유서에 두 번이나 등장하는 ‘죄송합니다’라는 표현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정초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월세가 밀린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주인’에게 죄를 짓지 않았다. 그런데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죄책감을 느끼는 그들은 누구이며, ‘죄송하다’는 그들의 고백을 받는 ‘주인 아주머니’는 누구인가. 그들의 죽음에 대한 사회복지 차원에서 실효적 대책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복지만의 문제는 아닐지 모른다.

도대체, 오늘날 착하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측할 수 없는 위험과 재난이 늘어나고 일상적이고 구조적으로 고통스러운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착한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수치심이나 죄책감에 익숙해지고 있다. 수천 만 국민에게 한 약속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도 미안하기는커녕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정직하게 자신의 삶을 살다가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이들이 부끄러워하는 시대다.

이처럼 수치심이 사라진 사회에서 착하게 산다는 것은 스스로를 죽이는 일이다. 착한 사람들이 착한 사람들을 죽인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죽음을 착하게 산다는 것의 사회적 산물이라고 말한다면 과장된 것일까.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착하다’고 말한다. 결국 그들은 죽음을 선택했다.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더 이상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사회가 정말 나쁘다고 하는 이유는 이토록 착한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박탈한다는 데 있다. 사회의 약자들에게 제발 착하게 살라고 강요하지 말자. 이렇게 나쁜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착하지 않은가.

 

권경우 문화평론가·광운대 강사
 nomad7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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