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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과 외천, 그리고 ‘뼈 없는 벌레’
낙천과 외천, 그리고 ‘뼈 없는 벌레’
  • 이향준 전남대 BK21박사후연구원·철학
  • 승인 2013.12.18 1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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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옛사람들은 흔히 하늘[天]을 특정한 삶의 양식을 대변하는 은유로 사용했다. 이런 문화적 관행은 하늘을 하나의 명령[命]의 근원지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이나, 나이 50을 ‘知天命’과 연관시키는 서술 방식에서 잘 나타난다. ‘樂天’과 ‘畏天’이란 낱말의 대비 역시 마찬가지다. 이 두 낱말의 대비 속에서 낙천은 외천에 대해 어떤 비교 우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진술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하늘을 명령자로 이해할 때, ‘외천’에 포함된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내재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명령의 존재를 함축한다.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사람이 두려움의 원인을 제거하거나 두려움의 원천으로부터 회피를 시도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와 비슷하게 외천에는 하늘이 명령한 것을 불이행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결과의 부정적 양상과 여기에 대한 회피의 심리가 개입돼 있다. 하늘의 명령을 두려움의 감정에서 경험하는 사람은 천명의 실행 여부 및 그에 따른 상상된 결과의 성격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리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낙천’은 같은 것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동화시킨 사람의 행동 양식을 보여준다. 그는 하늘의 명령을 자신의 내적인 마음의 소리와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일종의 의무론적 요청이 생긴다. 즉 하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그것이 내 마음의 자발적인 요구이기 때문이지, 그것의 결과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경우 관건은 내 마음의 요구를 따르려는 판단과 행위 사이의 일치 관계가 가져다주는 ‘즐거움’ 자체이다.


食藥同源이라는 관점에서 음식을 차리고 먹는 사람은 낙천과 유사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는 약으로서의 음식을 먹지만, 그것을 약으로 간주할 필요 없다. 자신이 좋아하고 즐겨하는 음식을 먹는 과정으로 여겨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병의 치료를 위해 일부러 쓴 약을 마시는 사람은 외천의 경우와 비슷하다. 병의 치료라는 결과가 쓴 약을 감수하도록 만드는 것이지, 약으로서의 음식을 먹는 즐거움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옛사람들은 낙천이 외천에 비해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똑 같은 것이 어진 이와 지혜로운 이의 대비에서도 발견된다. 『논어』 「이인」에서 공자는 “어진 이는 어짐을 편안히 여기고 지혜로운 이는 어짐을 이롭다고 여긴다”라고 했다. ‘편안함’과 ‘즐거움’은 부분적으로 겹치는 감정 상태이고, ‘이로움’과 ‘두려움’은 둘 다 어떤 것의 결과적인 면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중첩되는 영역이 있다. 또 「옹야」에서 공자는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고도 했다. 이 말을 잇는 구절에서는 물이 움직임의 은유이고, 산이 고요함의 은유라는 점이 드러난다. 결국 어떤 구별되는 계열체가 있다는 이야기다. 畏天, 利仁, 樂水, 움직임의 맥락이 있고, 樂天, 安仁, 樂山, 고요함의 맥락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외천은 천명의 움직임에 민감하고, 낙천은 반대의 것에 더 민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적이고 유동적인 천명의 내용과 실행, 그에 따른 결과의 가변성에 의해 판단과 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외천의 양식이고, 불변하는 천명의 안정적인 성격을 신뢰하고 그것을 내면화해서 자신의 행위의 동기로 일체화하는 것은 낙천의 양식이다. 이러한 삶의 양식을 묘사하기 위해 즐거움과 두려움, 이로움과 편안함, 산과 물, 움직임과 정지라는 낱말들이 쓰인다. 우리는 이 다양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구조적으로 조직해서 삶의 이상을 묘사하는 천명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다.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는 천명이란 막연한 대상에 대한 의미화와 이런 의미를 도입한 삶의 양상을 상상하는 문화적 참신함은 오늘날 우리들이 대부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망각의 삶에서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란 ‘명성과 화려함, 이로움과 해로움, 화와 복에 관한 주장이 몸에 베이고 뼈에 사무친’ 뼈 없는 벌레[無骨蟲] 이상의 것일 수 없다고 奇大升은 자조했다. 한 해의 마지막에 낙천과 외천이라는 낱말로 자신의 행적을 돌아다 볼 수 없게 돼버린 삶이란 어떤 종류의 삶일까. 우리는 이황이 기대승의 편지에 답했던 것처럼 그저 웃고 지나칠 농담으로 이 무골충이란 낱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이황이 이런 벌레는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는 사실은 망각한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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