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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교회의 첫 출발점 … 건립 당시부터 ‘뾰족집’으로 장안의 명물
한국 가톨릭교회의 첫 출발점 … 건립 당시부터 ‘뾰족집’으로 장안의 명물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3.11.26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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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의 역사

▲ 명동성당 정면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서울대교구주교좌성당인 명동성당은 공간과 역사, 그리고 상징적인 차원에서 한국 가톨릭교회의 첫 출발점이다. 이의 역사적인 배경은 1784년을 그 시원으로 하고, 그 중심인물은 우리나라 가톨릭 첫 영세자인 이승훈과 이벽이다.


지금의 명동성당이 자리 잡은 대지는 언덕배기로 당시 언덕 위 높은 곳에 종을 매달아 놓았다고 해서 鐘峴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행정구역상 明禮坊에 속했던 이곳에 천주교에 입교한 통역관 김범우의 집이 있었고, 그 집에서 1784년 봄 중국 베이징에서 영세한 뒤 귀국한 이승훈이 교회예절과 교리강좌 등을 열고 그와 정약전 삼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등 신앙공동체를 만들면서부터 명동성당은 그 역사를 시작한다. 교회 역사가들은 사실상 이 때 조선 천주교회가 설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명례방 신앙공동체는 그러나 이듬해 한 刑曹禁吏에게 발각돼 김범우가 유배되면서 해체된다.


이후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서양종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자, 당시 조선 교구를 관장하던 블랑 주교에 의해 조선 첫 천주교회의 상징성을 가진 김범우의 집이 성당 터로 매입된다. 블랑 주교는 이곳에다 우선 종현서당을 세워 운영하면서 예비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887년 5월, 명례방 지역의 대지를 마저 구입하면서 그 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아 내는 등 정지작업을 시작한다. 이 때 신자들은 저마다 팔을 걷어붙이고 노역을 보탠다.


조선 교구는 이 자리에 큰 성당을 짓고자 했다. 그런데 축성은 쉽지 않았다. 당시 대궐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대궐보다 높은 뾰족탑 형상의 성당을 짓겠다고 하니 조정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았던 것이다. 또 다른 풍수지리적인 이유도 들이댔다. 프랑스의 영향력을 가진 교구와 조정 간에 밀고 당기기가 계속되다 1892년 5월에서야 겨우 허가를 얻어 기공식을 갖는다. 그 사이 성당 건립 계획을 세우고 추진했던 블랑 주교는 죽고 그 후임으로 두세 신부가 부임해 일을 적극 이어간다.


두세 신부는 성당 축성에 본격적으로 매달려 설계와 공사의 지휘감독을 코스트 신부에게 전담케 한다. 코스트 신부는 건축분야의 전문가로서, 당시 양옥건축 기술자가 없었던 조선의 처지에서는 명동성당 건립의 적격자였다. 코스트 신부는 이후 서울의 약현성당과 용산신학교의 설계 감독도 맡아했다. 1896년 벽체공사가 끝날 무렵 코스트 신부가 죽고 프와넬 신부가 뒤를 이어 내부공사를 속행, 건설시작 12년 만인 1898년 5월 건립된다.


명동성당은 1898년 5월 29일 가톨릭의 성신강림대축일에 당시 조선 교구장인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갖고 교회의 문을 열게 된다. 건립 당시 명동성당의 이름은 성당이 위치한 지명을 따 종현대성당이었다.
명동대성당, 그러니까 오늘의 명동성당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그보다 훨씬 후인 1945년이다. 그해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하면서부터였다. 명동성당은 건립당시 ‘뾰족집’이라는 별칭으로 매일 많은 구경꾼이 몰려오는 장안의 명물이 됐다고 한다.


건립 이후 1947년과 1973년 두 차례에 걸쳐 수리공사와 사제관, 교육관 등 부속건물의 건립이 이뤄졌고, 한국 천주교 200주년인 1981년부터 스테인드글라스. 지붕동판 교체 등 대대적인 복원수리공사에 착수, 1984년에 마무리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전인 1939년 문화관이, 그리고 1947년에는 가톨릭출판사가 교회 안에 만들어졌다. 1900년 9월에는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유해를 용산신학교에서 옮겨와 유럽의 성당처럼 지하묘지에 안장해 지금도 신자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명동성당의 대지면적은 1만4천421㎡이며 건평은 1천498㎡다. 평면은 길쭉해 길이 69m, 너비 28m, 지붕의 높이는 23m, 종탑 높이는 45m이며, 지붕재료는 건립당시부터 동판으로 돼 있다. 라틴 십자형 三廊式의 장중한 고딕형으로 지어졌고, 내부에 있는 福者祭臺와 복자 像本은 1952년 79위의 복자 시복식 때 설치됐으며, 講臺는 푸아넬 신부의 고향에 있는 성당의 강대를 모방해 만든 것이다.


명동성당은 그 역사성과 독특한 건축미로 지난 1977년 11월 사적 제258호로 지정됐다. 한편 명동성당은 지난 2011년 6월 성당과 그 주변일대가 서울시에 의해 ‘관광명소’로 특화 개발된다고 확정 발표돼 민주화 운동 성지로서의 상징성과 역사성이 손상될 것이라는 논란 속에 휩싸여 있다.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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