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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에서‘구원과 선교의 성당’으로
‘아고라’에서‘구원과 선교의 성당’으로
  • 공윤경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 승인 2013.11.26 17: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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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34_ 명동성당

 

▲ 1898년 계단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명동성당. 수도 한양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였다.사진 문화재청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가 끝난 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대표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을 폭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이한열사건과 함께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최루탄에 맞서 싸우던 학생, 시민 등의 시위대는 명동성당에 모여 민주항쟁을 이어갔다. 명동성당은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상황 속에서 독재정권의 강압에 맞서 정권의 부도덕성과 불의를 적극적으로 고발함으로써 민주화 의식을 고취시켰던 저항의 공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진실을 밝히는 데 앞장섬으로써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던 희망의 공간이었다.


명동성당은 천주교 선교사들이 비밀리에 선교활동을 전파하던 중심이었으며 우리나라 천주교의 총본산이다. 명동성당이 지어진 곳은 최초의 순교자로 불리는 김범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시대 한성부의 행정구역 중 하나인 明禮坊에 속해 있었다. 이곳에서 천주교 신도들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됐고 이승훈이 세례를 줬으며 종교집회를 갖기도 했다. 1883년 블랑 주교가 대지를 매입하면서 성당 건립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성당은 코스트(G. Coste) 신부의 설계와 파리 외방선교회의 재정지원으로 1892년 8월 착공, 1898년 5월 준공됐다. 당시 성당은 이곳 지명을 따 ‘鐘峴성당’으로 불리다가 1945년 광복을 기점으로 ‘명동성당’으로 바뀌었다.


성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딕양식의 벽돌조 교회당이다. 석재가 아니라 적색과 회색 2종류의 벽돌이 사용돼 상대적으로 장중함은 적은 편이지만 고딕적인 요소가 살아있다. 궁궐보다 높은 경사지 언덕의 정상에 위치해 건립 당시 서울 사대문 안의 모든 곳을 볼 수 있었는데,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궐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성당이 지어졌다는 것은 당시 조선왕조의 권력이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지하묘역에는 병인박해 이후의 순교자 유해가 안치돼 있다. 그리고 성당 정문 왼쪽에는 1909년 이곳에서 이완용을 척살하려 했던 이재명 의사를 기념하는 ‘이재명의사 의거터’ 표석이 세워져 있다. 1980년대 중반은 우리나라에서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던 시기였다. 천주교는 이 격동기에 우리사회의 인권운동에 지지를 표하고 사회정의 고취와 사회복지 신장을 위한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그 활동의 중심지가 바로 명동성당이었다.


1987년 4월 상계동 철거민들의 집단 천막생활이 시작됐고, 5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을 폭로했으며, 6월 학생·시민들로 구성된 시위대는 독재 타도를 외쳤다. 이는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천주교가 사회정의에 대한 참여, 정치·사회·경제적 피압박 계층의 자유회복 등에 관심을 갖게 됐고 시국사건과 관련한 각종 미사, 시위, 농성 등을 통해 명동성당이 민주화 청원의 장소로서의 상징성을 형성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종교적 성역, 즉 치외법권적인 공간이면서 지리적 접근성과 인원 동원력이 뛰어난 서울의 한복판 명동에 위치했고, 많은 사람들이 집결할 수 있는 광장이 성당 내에 확보돼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 민주화 청원 장소로서의 상징성
1987년 6월 10일 재야와 통일민주당이 연대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개최했다. 경찰에 쫓기던 수백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명동성당에 모여 15일까지 집회를 이어가면서 민주화 운동의 불씨를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당시 성당에서 농성 중이던 상계동 철거민들이 시위대에게 밥을 해 줬고 계성여고 학생들은 등교할 때 도시락을 전해줬다. 인근의 직장인과 상인들, 시민단체들도 쌀, 의류, 성금 등을 제공하며 물심양면으로 시위대를 지원했다. 그리고 성당에서 농성 중인 학생과 시민들을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무력진압을 시도했을 때,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을 먼저 밟고 지나가라며 맞섰다.

마침내 정치권력으로부터 시위대의 안전 귀가, 사후문책 포기라는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농성투쟁은 자진해산 결의를 통해 마무리됐다. 농성이 끝난 후에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6월 항쟁은 전국적으로 계속 이어졌다. 위기 국면에 처해 체제의 정당성을 위협받은 집권세력은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 언론의 자유 등 8개 항목을 담은 선언문을 발표했다. 6·29선언은 시민과 학생에 의해 주도된 6월 항쟁 앞에 집권세력이 항복함으로써 이뤄졌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민주적 절차를 보장함으로써 국민의 저항은 약화시키고, 집권당의 자금력과 조직력, 언론을 이용한 여론조작 등으로 직선제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집권세력의 계산이 깔려있었다.

결국 6·29선언은 6월 항쟁의 성공적인 결과물로 보이지만 이후 이어진 정권의 행태를 보면 집권층의 권력 연장을 위한 노림수에 국민들이 기만 당한 것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한 사건이었다.
1987년 6월 이후에도 명동성당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복지, 노동, 통일 등 크고 작은 시위가 끊임없이 이어져 명동성당이 종교적 장소뿐만 아니라 역사와 시대의 증언대, 대변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사회가 민주화의 과정을 밟기 시작하면서 명동성당은 집단적 이익을 성취하기 위한 농성장소로 변한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장기농성, 종교의식 방해, 쓰레기 투기 등으로 인해 시위대에 대한 무관심, 적대의 반응이 나타나기도 했다.

1990년대부터 탈 정치화 성향 뚜렷해져
그리고 내부적으로 성당의 정치적 입장표명에 제동을 가하려는 시도도 있었고 종교공동체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2000년 12월 집회·시위 허가제를 실시하면서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의 민주화 운동은 소극적으로 변했으며 1990년대부터 나타났던 정치적 보수화, 탈정치화의 성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명동성당은 누가 뭐라고 해도 여전히 명동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26년 전 수많은 학생, 시민, 노동자들의 투쟁과 열정으로 민주화의 성지, 소수자들의 피난처라 불리던 명동성당의 모습은 이제 찾기 어렵다. 용산참사, 뉴코아 이랜드 비정규직 사태 때 성당에 농성 천막을 치지 못하게 하거나 농성 중인 천막을 철거했다. 또한 6월 민주항쟁 24주년을 기념하는 ‘민주올레’ 행사에서는 순례자들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성당을 관광명소로 특화 개발하는 것에는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바로 인근의 명동 재개발3구역에서 발생한 철거 용역들에 의한 강제철거와 폭력사태에는 침묵했다. 이것이 과연 우리사회의 부조리를 규탄하고 약자들의 권리를 청원하는 ‘아고라’에서 종교 본연의 역할인 ‘구원과 선교의 성당’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하는 것일까.



공윤경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부산대에서 박사를 했으며 도시공학을 전공했다. 최근에는 산동네, 도시재생, 다문화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다. 논문으로는 「다문화공간에 대한 이중적 시선과 차별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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