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9 06:25 (월)
피펫을 든 임상의사
피펫을 든 임상의사
  • 이준엽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박사과정
  • 승인 2013.11.19 11: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이준엽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박사과정

이준엽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박사과정
지금으로부터 불과 4년 전, 종합병원 진료실에서 세극등 현미경을 사이에 두고 수많은 환자들과 대면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수술실을 드나들었던 필자가 지금은 온종일 연구실에서 피펫을 손에 쥐고 실험에 몰두하고 있다. 필자가 소속된 기관은 기초연구를 하고자 하는 젊은 의사들이 모인 곳,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이다.

필자가 기초연구를 위해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던 시절, 4년이라는 아까운 시간을 진료와는 상관없는 일에 낭비할 필요가 있겠냐는 우려가 많았다. 그 아깝다는 4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필자는 이곳에서의 생활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되돌아본다. 무엇보다 연구가 재미있었다. 생명현상에 대해 새롭게 설명하고 그 기전을 찾아낸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한 연구를 좋은 환경에서 유능한 교수님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카이스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의사 동료들 간의 공동연구는 물론이거니와, 물리나 화학, 기계 등 기초과학과 응용공학 분야와의 협력연구도 활발하다. 이러한 다학제간 활발한 교류를 통해서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얻으며, 이를 증명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필자에게는 소중한 경험이었고 앞으로도 좋은 연구를 이어갈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이 됐다.

물론 어려움도 많았다. 초보연구자로서 시행착오를 무수히 겪었다. 또한 임상의사의 한정된 사고의 범위를 기초과학자의 관점으로 확장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일례로, 지도 교수님의 “사람 눈의 망막 하나는 총 몇 개의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나?” 라는 기본적인 질문에 땀을 뻘뻘 흘린 기억이 있다. 안과학를 전공했고 관련된 연구를 하겠다고 계획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기초연구자로서 인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갖추라는 교수님의 중요한 메시지였던 것이다.

좋은 연구 인프라와 세계적인 수준의 교수진을 갖춘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에서는 의사 출신 대학원생이 다양한 실험실에 소속돼 각자의 연구를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 현재까지 100여명의 학생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거나 재학 중이며, 훌륭한 연구 결과물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혹자는 “의과대학에 기초의학교실이 있는데 굳이 임상의사들이 기초연구를 할 필요가 있냐?”라고 묻는다. 그렇다. 중복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제한된 수의 기초의학교실에서 임상 각과의 연구를 모두 포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연구 방향이 부합하지 않는다면 공동연구를 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만약 임상의사가 연구능력이 있다면 독립적으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신약개발이나 의료기기 개발 등 환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진료를 통해 아이디어를 얻고, 연구를 통해 얻은 결과물을 신속하게 임상에 적용하고 다시 피드백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임상의사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최근에 각광받고 있는 중개의학(translational medicine)의 효율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또한 기초의학과과 임상의학이라는 의학계 내의 그리고 의학계와 기초과학계 사이의 활발한 교류를 유도할 수 있는 소통과 융합의 매개체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러한 맥락으로 카이스트 뿐만 아니라 일부 의과대학에서 기초의학교실과는 별개로 ‘의과학과’ 라는 이름의 학과가 개설돼 임상 또는 기초의학과 관련된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매년 임상의사의 연구참여 비율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전문적인 기초연구 교육을 받은 젊은 임상의사들이 졸업 후 어떠한 진로를 선택하고 기초의학의 발전에 과연 어떠한 기여를 할지 지켜 볼 필요가 있겠다. 졸업생 수가 계속 증가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필자를 포함해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진로의 옵션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환자 진료는 하지 않고 기초연구만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의 옵션은 기초연구와 환자 진료를 병행하는 것이다.
의학의 뿌리라고 하는 기초의학교실에 의사출신 기초의학자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이미 심각한 문제로 인식된다. 기초연구 교육을 받은 임상의사를 기초의학교실의 활성화를 위해서 이용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수 있다. 기초를 포기하고 임상을 선택하는 의사가 있듯이 반대로 임상을 중단하고 기초를 선택할 가장 유력한 후보군들이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대부분은 다시 대학병원으로 돌아간다. 환자 진료와 기초연구를 병행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일본만 보더라도 각기 다른 기관에 소속돼 연구와 임상을 따로 수행할 수 있지만, 국내에서는 불가능하다. 또한 미국의 MGH와 같은 연구 중심으로 운영되는 대형병원이 아쉽게도 아직 국내에는 없다. 최근 국내에서 지정된 연구중심병원들이 정말 연구가 ‘중심’인 병원이라 하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현재 대학병원에서는 연구하는 임상의사를 어떻게 평가할까. 각 병원 그리고 각 과마다 다를 수는 있지만, 많은 수의 병원에서는 환자의 진료나 수술을 통해 이윤이 얼마나 많이 창출되느냐에 따라 임상 각과의 향후 발전을 위한 투자가 결정된다. 교수 임용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병원의 수익의 측면에서 연구능력이 우수한 의사보다 진료나 수술을 잘하는 의사가 더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훌륭한 임상능력은 필수이고 연구능력은 선택인 셈이다. 따라서 기초연구를 계획하는 젊은 임상의사들은 이러한 진료에 대한 잠재적인 핸디캡을 능동적으로 커버해주고 연구에 비교적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모교병원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여러 가지 고민 끝에 타교 대학병원의 전임의(임상강사) 과정에 지원할 예정이다. 다른 지원자들과 경쟁해 연구능력을 인정받는다면 선택될지는 모르겠으나, 다시 몇 년 내로 필자가 원하는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임상의사로서 훌륭한 진료와 수술 능력도 반드시 갖추어야만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진정으로 연구가 ‘중심’이된 연구중심병원의 설립을 기대해본다.
 
이준엽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박사과정
영남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안과전문의를 취득했다. 당뇨망막병증 등 망막혈관신생 질환의 병인과 치료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