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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교양교수
‘나 홀로’ 교양교수
  • 박홍규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02.10.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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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푸코나 사이드가 우리 나라 교수였다면 어떠했을까. 아마도 ‘철학 교수’ 푸코는 그 저서인 ‘임상의학의 탄생’이나 ‘감시와 처벌’ 또는 ‘성의 역사’ 등으로, 또는 문학이나 미술 등의 예술론, 또는 감옥과 동성애 등의 해방운동으로 교수 진급은커녕 교수 임용조차 불가능했으리라. 어느 학과에 교수 응모를 할 수 있을까. 임상의학이니 성이니 했으니 의과대학의 비뇨기과일까. 그러나 그는 의사가 아니니 당연히 거절 당했으리라. 아니면 감옥에 대해 썼으니 경찰행정학과?

‘영문학 교수’ 사이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외에도 정치, 언론, 음악, 지식인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책을 쓰고 활동한 그는 우리 나라에서 설령 교수가 됐다 해도 그 책들을 ‘영문학’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소위 연구업적으로 전혀 인정받지 못했으리라. 푸코나 사이드에 대해 쓰여지는 산더미 같은 철학, 영문학교수들의 논저는 연구업적일 것이나, 정작 푸코나 사이드 자신은 그런 평가를 받지 못했으리라.

나는 푸코나 사이드와 절대로 비교될 수는 없지만 전공인 ‘노동법’ 이외의 책을 연구업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과거’는 함께 한다. 책이나 논문 중의 다수가 전공과 무관하다는 이유에서 연구업적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임용이나 승진, 연구비 지급, 대학평가 등등 그 불이익은 대단했다.
그래도 이럭저럭 살아왔으나 연구비 신청은 아예 포기했다. 연구업적도 등수가 있는데, 최고등급이라는 ‘전국적 전공 학회’에는 며칠 머물다 탈퇴해 실을 수도 없다.

흔히들 ‘학제적’ 연구 운운하지만 우리 나라의 그것은 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세분된 전공을 갖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것을 뜻한다. 즉 학문의 교류나 통합보다 정작 학자 사이의 그것을 말한다. 물론 그런 연구도 필요하나, 한 사람이 하는 것도 푸코나 사이드의 경우처럼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학문, 아니 전공은 난공불략의 국경선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내가 헌법에 대한 책을 썼다가 그 내용이 아니라 국경 침입죄로 호된 추궁을 당했다. 나는 아예 무시했지만, 앞으로는 그런 논죄가 아니라 내용을 가지고 얘기하는 최소한의 교양이 있기를 기대한다.

2년 전 나는 ‘법과 예술’이라는 강좌를 만들었다. 사실은 예술 강좌를 하고 싶었으나 법이란 말이 들어가야 했다. 그것도 ‘법과 미술’로 하면 미술대학에서, ‘법과 문학’으로 하면 문과대학에서 시비를 한다기에 그런 이름이 됐다. 그러나 법과대학에서도 사법시험과 무관하다는 이유에선지 1년만에 없어지고 지금은 일반교양 과목으로 남았다.

학교 돈으로 먹는 회식에는 참여하지 않는 탓인지 나는 전공이 희미한 나홀로 ‘교양교수’가 됐다. 그러나 이게 좋아도 너무 좋다. 남은 10여년, 연구업적과 무관하게 그런 강의를 하고, 평가에서 아예 제외되는 연구 아닌 연구를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아니 그 전에, 곧, 쫓겨날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좋다. 이 글은 그 예고편인가

박홍규 / 기획위원·영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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