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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처연한 노을은 진달래로 피고지고
아, 처연한 노을은 진달래로 피고지고
  • 교수신문
  • 승인 2013.08.26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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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28_ 지리산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 지리산 천왕봉의 일출 광경이다. 이 장엄한 풍경은 비경과 비극이 만나면서 더 깊어진다.사진제공 순천대 지리산문화연구단


지리산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성모신앙이나 신비스러운 기운을 안고 있는 유람의 성지 혹은 이상향의 은둔처였다. 뿐만 아니라 백두대간이 흘러나왔다고 해서 頭流山, 옛 三神山의 하나인 方丈山, 조선 태조의 왕위 찬탈에 불복한 채 고려조에 대한 의리를 밝힌 지리산의 굳건함을 기리는 불복산의 전설도 깔려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유학자들이 심성을 수양하는 수신처가 되기도 했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영남학맥을 이어갔던 남명 조식은 지리산을 열두 번 오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깊은 속정이야 ‘뱀 비늘을 숨긴 지리산의 검푸른 내’처럼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나, 실천적 성향이 강한 학풍과 마지막 은둔지로 삼았던 지리산의 연결지점은 어디일까.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고 밖으로 의로써 실천한다’는 남명의 경의사상의 원천은 바로 지리산이었다.

한 시대를 대표했던 유학자가 ‘절대 복종하지 말라’며 처사로 남기로 자청하며 품고자 했고, 닮고자했던 지리산의 기상. 임진왜란 때 남명 문하에서 제일 먼저 의병장이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후 일제말기 학도병을 거부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던 식민지 청년들에게도 지리산은 반역의 거점이자 유토피아의 공간이었다. 신선이 드나들었다는 그래서 지상과 천상의 경계였던 지리산 청학동의 石門이, (산에서) 내려오면 안락한 생활이 보장된다며 빨치산의 하산을 권유하는 ‘安樂門’ 표식이 되기까지 지리산은 그저 저기 무릉도원이 아니라, 언제나 현실의 첨예한 갈등의 양면으로 우리 곁에 있었다. 지리산의 秘境과 悲境이 동시적으로 울리면서.

빨치산의 기억 혹은 최초의 국립공원
소설가 조정래는 『태백산맥』에서 피아골 단풍이 이리도 고운 것은 먼 옛날부터 이 골짜기에 수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원혼이 단풍으로 피어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백제와 신라의 싸움터, 임진왜란, 빨치산 토벌에 이르기까지 지리산은 골골이 계곡마다 피의 역사를 품고 있다. 피아골 붉은 단풍은, 그러니까 골골이 산화된 붉은 피의 처연한 서사시다. 특히 지리산이 처절한 피의 현장으로 부각된 것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조선인민유격대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지리산의 파르티잔, 빨치산의 역사는 이보다 앞선다. 1946년 대구 10월 인민항쟁으로 유혈사태가 일어나면서 남로당이 불법화되는 과정에서 산으로 들어간 좌파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야산대들이 대한민국 빨치산의 전신이다.

빨치산 대장 하준수(南道釜)의 탄생과 함께. 야산대 일부는 1948년 여순 사건 이후 군 정규 부대에서 전환한 유격대에 흡수돼 본격적인 파르티잔 활동을 시작했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덕유산, 백운산을 연결하며 경남, 전남, 전북을 잇는 지리산 유격지구는 여기에서 탄생했다. 이후 1949년 창설된 조선인민유격대와 합류했다. 조선인민유격대는 제주 4·3과 여순 사건을 한국 전쟁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으며, 토벌대와의 전투 과정은 일종의 작은 전쟁이 돼 한국전쟁 전초전을 형성했다. 한국전쟁 전부터 이현상이 지리산에서 지휘하던 부대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강원도로 후퇴했다가, 다시 전선을 재정비해 1951년 남조선인민유격대, 이른바 ‘南部軍’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지리산 첩첩산중 손아귀에 거머잡고/ 험악한 태산준령 평지같이 넘나드네/ 지동치듯 부는 바람 우리 호통 외치고/ 깊은 골에 흐르는 물 승리를 노래한다/ (후렴) 우리는 용감한 지리산 빨치산/ 최후의 승리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다”(「지리산 유격대의 노래」). 노래가사와는 다르게 이들의 행로를 따라, ‘달뜨기-웅석봉-짜래골-배암사골-의산-범왕골-풀무잔등-피아골-노고단-곡성-고리봉-달궁골-학동골……’ 그 계곡과 골짜기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산화해 갔다. 1963년 11월 12일 경상남도 산청군의 지리산 기슭에서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생포됨으로 지리산 빨치산의 기억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1967. 12. 29 지정)의 기념으로 대체된다. 반세기를 지나며, 지리산 빨치산은 노고단 드라이브 길의 환상적 풍경과 함께 달리거나 ‘힐링안보관광’에서 반달가슴곰의 이야기와 함께 조우한다.

‘지리산 찔레꽃’으로 피어난 생명들
한쪽의 기억이 스러질수록 한쪽의 기억은 더 강력한 신화가 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지리산에서 모의됐던 탈식민화에 대한 동력이나 근대국민국가에 이상적 기획을 모두 탈취당한 채, 만들어진 공포의 적색 병기 빨치산이라는 기표는 대한민국, 특히 이승만정권의 동일성을 위해 배제되고 절멸돼야 했다. 피아골에 숨어지내는 빨치산 ‘아가리부대’의 극악무도한 야만성을 최대한 강하게 잡아냈던 영화 「피아골」(1955)의 악마들이 인간으로 복권하는 데 30년이 넘게 걸렸다.

「남부군」(1990), 「태백산맥」(1994)에서는 빨치산 그들 역시 인간적 고뇌에 빠진, 산 아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남부군』의 저자 이태는 남부군 기록을 남긴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록들에 의하면 49년 이래 5년여에 걸친 소백 지리 지구 공비토벌전에서 교전회수 1만717회, 전몰군경의 수 6천333명, 빨치산 측 사망자의 수는 믿을만한 근거가 없지만 줄잡아 1만 수천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피아 2만의 생명이 희생된 그 처절함이 세계유격전 사상 유례가 드문 이 엄청난 사건에 실록 하나쯤은 남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죽어간 그 많은 젊은 넋들에게 이 기록이 조그만 공양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지리산 굽이굽이 산자락에 널브러진 주검들은 죽어서야 가해자/피해자, 적군/아군, 산 위/산 아래의 구분 없는 대동세상에서 만났을까. 어느 시인이 노래한다. “지리산 등성이 여기저기 누운/ 산사람 혹은 국방군/ 그들이 뒤엉켜 함께 피우는/ 찔레꽃/ 지리산의 찔레꽃”(「지리산 찔레꽃」 중에서). 이미 예부터 민중들이 기복을 비손했던 이 지리산이 이제 역사의 祭場이 된다. 이쪽과 저쪽의 죽음과 한을 해원하는.

停戰 60주년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각에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한국전쟁 정전협정 기념식에 참석했다고 세계의 언론은 앞다투어 보도하고, 대한민국 곳곳에서 열린 정전 기념행사가 떠들썩하다. 60년 전 지리산 칼바위골 깊은 아지트에 숨어들었던 殘匪들이 협상방송을 들으면서 숨죽이며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62조의 ‘휴전협정’이 낭송되는 그 어디에도 자신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들이야말로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도 될 수 없었던 존재가 아니었던가. 절단과 분리의 상처가 너무도 깊이 패인 예외적 존재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가 살아남은 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너무도 오랫동안 이념 안에서 박제화된 소리가 아닌.

 

문재원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
부산대에서 박사학위를 한 필자는 한국현대소설·로컬리티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문학담론에서 로컬리티 구성과 전략」, 「지역문학관의 재현과 로컬리티」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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