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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과 母性의 공간 또는 ‘素數의 花園’
포용과 母性의 공간 또는 ‘素數의 花園’
  • 교수신문
  • 승인 2013.08.26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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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서 바라본 지리산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의제는 반제·반봉건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근대화는 식민지 근대라고 하는 모순을 잉태한 채로 시작됐으니, 이는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분단체제 형성과 국민국가 형성의 실패, 제국의 수탈 경제 체제와 독점적 재벌 형성으로 인한 봉건적 잔재의 지속 등의 결과를 낳았고, 그것은 21세기를 맞이한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다.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국가 형성을 위해서는 정치적으로는 분단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반제국주의, 경제적으로는 계급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반봉건주의가 무엇보다도 당면한 과제로 요청된다.

그러한 반제·반봉건에 대한 민중들의 企投는 반식민투쟁, 해방공간에서의 갈등, 6·25, 4·19, 5·18로 계속됐다. 이같은 민중들의 저항은 대체로 반제 반봉건의 의제를 무력화시키려는 세력들에 의해 실패하곤 했는데, 이 과정에서 민중들이 의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지리산이었다. 일찍이 지리산은 조선왕조의 창건 과정에서도 민중의 편에 섰던 것으로 신화화됐듯이 항상 그 넓은 자락을 펴서 민중들을 안아주던 어머니 산이었다.

특히 근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보여줬던 어머니 산의 모습은 한국을 대표하는 대하장편소설들에 반복적으로 재현됐다. 박경리의 『토지』는 지리산을 병풍처럼 뒤로하고 있는 하동 평사리를 배경으로 갑오년의 동학혁명이 발생하던 무렵부터 서사가 촉발된다. 또한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는 반제 반봉건을 몸으로 실천했던 민중들의 투쟁의 공간으로 벌교와 지리산이 제시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태의 『남부군』,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은 지리산에서 불패자의 열정과 의지로 삶과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나들었던 이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하동 출신 이병주의 『지리산』
그중에서 이병주의 『지리산』은 식민지시기부터 한국전쟁 종전까지 지리산을 거점으로 삶을 살아내야 했던 이들을 형상화한 대하장편소설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智異山이라고 쓰고 지리산이라고 읽는다”라고 서술한다. 이는 지리산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 시대와 역사로부터 맥락화 된 역설적 의미망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직관이 드러난 구절이다. 한자 그대로 아는 것과는 다른 산, 쓰는 것과는 다르게 읽혀지는 산, 풍성하게 흐르는 계곡과 부드러운 능선을 품고 있는 어머니 산이면서 굽이굽이마다 권력자들의 폭력성과 그로 인한 민중들의 생채기를 안고 있는 산이 지리산이다.

이처럼 지리산이 갖고 있는 양면성과 모순을 작가 이병주는 일찍이 포착해 낸 것인데, 대상이 가지고 있는 잠재성과 양가성에 대한 인식은 뛰어난 작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날카로운 직관의 소산일 것이다. 어쩌면 지리산 자락 언저리, 하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병주에게 인식된 지리산은 고향, 친구, 추억, 국토, 역사의 비극적 현장이 복합적으로 중첩된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가 직관적으로 포획해낸 것처럼 지리산은 양가성을 잠재태로 시대와 역사에 대한 역설과 비극을 함의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지배 권력에 대해서는 저항과 비타협의 자세를, 핍박받는 민중에 대해서는 포용과 모성의 태도를 보여줬던 공간이 바로 지리산이다. 지리산은 겉으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선을 가지고 있지만 안으로는 고결한 열정만큼의 둔중한 무게를 가지고 있다. 하여 지리산은 소통과 상생의 산이면서 비판과 저항의 거점이었다. 때문에 지리산은 기나긴 세월 동안 한국사의 수많은 간난의 과정을 그대로 간직한 역사의 산이 됐던 것이다.

남북에서 버림받은 ‘아름다운 존재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이병주는 지리산을 素數의 花園에 비유한다. 지리산은 꽃밭 혹은 아름다운 정원이었으며, 그 공간은 素數들에 의해 공유되고 지켜나가야 한다는 함의를 전제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박태영은 식민지 말기 일제의 학도병 징집에 반발해 하준규 등 10여 명의 일본유학생과 더불어 지리산으로 숨어든다. 그들은 ‘보광당’을 조직하고 민족국가 건설에의 초석을 다지자고 결의하는데, 작가 이병주는 근대국가의 기원으로 지리산을 제시하고 이를 ‘素數의 花園’으로 상정한 것이다. 1과 자기 자신만으로 나누어떨어지는 1보다 큰 양의 정수인 素數는 리만이란 수학자에 의하면 “자연수의 세계에서 원자와 같고 가장 아름다운 조화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소수와 같은 존재는 자신의 본질적 특질을 잃지 않은 고결, 순결의 자질을 지켜내는 존재일 터이다. 이병주는 아름다운 화원과 같은 지리산에 모여든 박태영과 같은 젊은이들을 민족의 순수를 담보하고 있는 순결하고 고결한 존재로 표상한다. 그들은 빨치산으로 명명돼 남에서도 북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채 민중의 기억 속에서만 역사투쟁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져갔다. 그런데 이병주는 그들을 우리 모두의 정체성의 근원으로서의 素數라 이름하고, 그들이 고결하게 지켜낸 것을 화원의 사상이라 추앙한다. 그들은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던 인민전선의 전사들, 혹은 쿠바 혁명에 참여했던 체 게바라처럼 온몸을 던져 자신의 철학과 의지를 관철하려고 했던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상처로 각인된 과거의 시간이나 영광으로 다가올 미래의 시간보다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현재의 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기투했던 용기있는 존재들이었던 셈이다. 지리산은 한국 근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의 반제·반봉건의 거점이자 소수와 같은 고결한 존재들의 투쟁의 공간이자 영원한 안식처가 됐다. 하여 물질과 권력과 성을 평등하게 공유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꽃밭으로서의 소수의 화원이 바로 지리산이라고 이병주는 그의 대표작 『지리산』에서 상찬하고 있다. 이처럼 지리산은 불패자의 고결한 열정과 의지를 가진 이들에게 소수의 화원으로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또한 아름다웠던 소수의 존재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들과 하나 되어 여전히 유효한 현존재로 지속될 터이다. 지리산과 어깨동무를 한 채로.



최현주 순천대·국어교육과
전남대에서 한국현대소설 연구와 비평으로 박사를 했다. 국어교육과에 재직중이며 HK사업단인 지리산권문화연구단장으로 지리산권 문화생태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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