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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바이러스 연구의 또 다른 맛
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바이러스 연구의 또 다른 맛
  • 이상현 서울대 생명과학부·석박사 통합과정
  • 승인 2013.07.29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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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 서울대 생명과학부·석박사 통합과정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자궁경부암을 유발하는 HPV,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이러스들이다. 바이러스는 일반적인 여과지를 통과할 정도로 매우 작다. 그래서 박테리아가 병원균으로서 17세기에 일찍 발견된 반면 바이러스는 전자현미경을 통해 19세기에 들어서야 그 실체를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 세포가 3만개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것에 비하면 바이러스는 적으면 몇 개, 많아야 몇 백 개의 유전자만을 갖고 있다. 따라서 바이러스는 숙주세포에 침투시 숙주세포의 대사기구 등을 빌려서 사용하고 그를 조절하는 핵심 유전자들만을 보유한다. 말하자면 거지가 밥숟가락만을 들고 다니는 꼴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바이러스 연구자의 일차 과제는 당연하게도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것이다. 놈을 잘 알아야 치료제를 만들 수 있는데, 작고 단순해 보이는 이 바이러스를 온전히 이해하고 잡는 일은 사실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1980년대에 발견돼 30년간 연구된 HIV는 단 9개의 유전자만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수 만 편 이상의 논문이 발표됐지만 HIV의 치료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이러니하게도 바이러스 중에서도 유전체가 작을수록 치료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HIV나 간염바이러스 등이 그렇다. 바이러스 연구자들은 우선 바이러스 유전자의 기능과 특징을 이해하는 데 노력한다. 그리고 바이러스 감염 때 나타나는 세포 내 변화에 대해서 면밀히 연구한다. 나아가서는 개체수준에서 나타나는 병증 반응에 대해 관찰한다. 이렇게 바이러스와 숙주와의 상호관계를 이해함으로써 바이러스 치료에 대해 한발씩 다가간다.

이와는 상관없이 바이러스 연구에서 새로운 생명의 원리를 발견하기도 한다. 1970년 역전사효소의 발견이 대표적인 예다. 당시에는 DNA에서 RNA, 단백질까지 이어지는 유전정보의 흐름, 이른바 ‘센트럴 도그마’라고 하는 것이 학계의 정설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RNA에서 DNA가 합성되는 ‘역전사’가 RNA 바이러스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볼티모어와 테민이 발견해 학계에 보고했고, 당시에는 바이러스에 특이적인 현상인 것으로 생각됐지만 후에 일반적인 생명현상으로 확대돼 이해됐고, 그들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75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렇게 바이러스 연구자들은 종종 놀라운 발견을 하곤 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바이러스는 유전자 수가 적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 비해 개별 유전자 기능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가 가능하다. 바이러스 유전자가 세포 내 어느 유전자들과 서로 연관되며 구조적으로 어떤 특징을 갖는지 등에 대해 상세히 밝혀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바이러스가 숙주의 거의 모든 생물학적 대사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알려지지 않은 생물학적인 과정이 있다면, 바이러스는 반드시 그것에 스스로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관여할 것이다. 때문에 바이러스 유전자를 연구하다 보면 우연히 완전히 새로운 생명현상과 마주할 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지난 5년 동안 사람 거대세포바이러스(HCMV)의 독성과 이 바이러스가 사람의 면역체계를 피해나가는 메커니즘을 연구해왔다. 하지만 최근에 바이러스가 사람의 마이크로RNA(microRNA)를 분해하는 새로운 현상을 우연히 발견했다. 마이크로RNA가 세포 내에서 어떻게 분해되는지는 아직 베일에 싸여있기 때문에, 어쩌면 이 바이러스에서 새로운 생명현상에 대한 접근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즐거운 생각이 든다.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일은 바이러스 퇴치라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가는 긴 여정인데, 그 동안 우연히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생명 현상들은 바이러스 연구가 주는 또 다른 맛이다. 이렇게 기초 과학을 하는 사람이 지금의 연구가 또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할 수 있는 것 이야말로 연구를 하면서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맛이 아닐까.

이상현 서울대 생명과학부 석박사 통합과정
서울대 생명과학부를 졸업했다. 바이러스에서 마이크로RNA 분해물질 등 바이러스의 면역회피 기작 등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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