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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非世說_ ‘爾斯智王’ 미스터리
是非世說_ ‘爾斯智王’ 미스터리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3.07.0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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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통더위 속에 우리 고대사를 다시 한 번 되짚어보게 하는 서늘한 소식이 전해져 온다. 옛 新羅가 다시 뚜벅뚜벅 역사의 뒤안길에서 걸어 나오고 있는데, 그 키워드는 爾斯智王이다. 1921년 발견된 후 근 한 세기 가깝게 미스터리였던 신라 금관총의 주인을 밝혀줄 단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당시 발굴 때 금관과 함께 부장자의 것으로 보이는 환두대도 세 자루가 나왔다. 물론 부식되고 녹이 슨 상태여서 이 칼들의 내용을 알아볼 수 없었다.

이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해 온 한 자루의 칼이 녹을 벗겨내는 과정에서 칼의 주인으로 여겨지는 명문이 발견됐는데, 그것은 ‘이사지왕’이란 글씨였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된 또 다른 한 자루의 칼에서도 ‘爾’ 자 등의 명문이 발견됐다. 칼의 주인이면 무덤의 주인 아닌가. 금관총은 4~5세기 고대 신라의 무덤이다. 금관 등이 나왔다는 점에서 당시 최고지배층의 무덤인 것만은 확실시돼 왔는데,  ‘왕’이란 직함을 붙인 이름의 명문으로 고대 신라의 역사가 다시 쓰일 수 있는 개연성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에서 군주의 칭호는 마립간을 거쳐 서기 503년 지증왕 때 비로소 ‘왕’이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신라가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이 갖춰졌다는 것이 기존의 학설이다. 그러나 이번 금관총 환두대도의 ‘이사지왕’ 명문 발견으로 그보다 훨씬 이전인 4~5세기부터 이미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새로 대두된 것이다.  ‘이사지왕’이 누군지도 미스터리다. 『삼국사기』 등에 등장하는 신라 상고기의 왕 가운데 ‘이사지’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마립간’ 칭호를 썼던 내물·실성·눌지·자비·소지왕 중 한 명의 별칭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있을 뿐이다.

역사는 발굴과 고증, 그리고 연구를 통해 그 실체가 하나씩 벗겨진다. 그러나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부분이 드러난 것보다 훨씬 많다. 이런 갑갑함이 역사 공부의 묘미를 더해주기도 한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도 한 꺼풀씩 벗겨져 적잖은 부분이 드러났지만 궁금증은 여전하다. 도로시 이디(Dorothy Eady, 1904~1981)라는 영국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이집트學(Egyptology)’에 가끔씩 회자되고 있는 미스터리한 사람이다. 3살 때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후 그녀의 인생은 이상한 방향으로 간다. 이집트 19왕조 2대 파라오인 세티 1세가 그녀에게 빙의된 것이다. 그 이후로 그녀는 ‘옴 세티(Omm Sety)’로 자처, 세티 1세의 신전이 있는 ‘아비도스(Abydos)’에 머물면서 세티 1세와 교감을 한다. 그러면서 이집트 역사유적의 발굴에도 적잖은 조언을 한다.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으면 하늘로 올라가 세티 1세에게 물어보기도 했다는데, 그 가운데 몇몇은 고증을 통해 사실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집트 역사 발굴의 숙제로 남아있는 네페르티티(Nefertiti) 왕비의 무덤 발굴에도 관여했다. 1970년대 초, 그녀는 네페르티티의 무덤이 왕비의 양아들인 투탄카멘 무덤 가까이에 있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는 말하지 않았다. 세티 1세가 그걸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의 조언을 토대로 대대적인 발굴이 벌어지고 적잖은 단서가 발견됐다. 도로시 이디의 이런 얘기를 담은 책이 『옴 세티를 찾아서(The Search for Omm Sety)』(1987)다. 그녀의 구술을 바탕으로 조나단 콧이 펴냈다.

우리 고대 신라 ‘이사지 왕’에 대한 궁금증도 앞으로 고증과 연구를 통해 풀릴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우연찮은 계기도 있을 것이다. 한국판 『옴 세티를 찾아서』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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