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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푸른 평화의 이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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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신문
  • 승인 2013.06.18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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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24_ 제주도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2000년을 전후해서 4·3사건에 대한 국가 차원의 공동체적 보상의 일환으로 4·3평화공원이 조성되기 시작했는데, 공원조성 과정에서 제기된 비판 중의 하나는 부지 위치의 적절성에 대한 것이었다. 대량의 피해가 발생한 지역이 제주 곳곳에 산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4·3사건과 특별한 관련을 갖지 못한 무장소성의 공간이 부지로 선정됐다는 비판이었다. 그러나, 군인들이 이유 없이 학살한 모녀의 사례를 공원 인근에서 발굴해 ‘飛雪’이라는 조각상으로 재현함으로써 이 부지에 어느 정도의 상징성을 부여했는지와는 무관하게, 제주 사회는 제주 전체가 4·3사건의 공간이었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 제주 4·3평화공원 내부의 모습. 당시 학살당한 주민들의 이름을 새긴 위령패가 만들어져 있다

국가 상상을 위한 격절 4·3사건이라는 명칭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경찰의 탄압 중지, 남한의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수립 반대 그리고 통일 정부 수립을 촉구하면서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단체와 경찰서 등을 공격한 1948년 4월 3일을 특정하게 부각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관덕정 앞의 발포사건을 시작으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혹은 1957년 4월 최후의 무장대원이 생포될 때까지 근 7여 년 혹은 10여 년에 걸쳐 제주 전역에서 발생한 각종 사건들,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25,000∼30,000명의 인명피해를 불러왔지만 50년이 지난 21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거나 아직도 묻혀 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 전체를 가리킨다.

4·3사건이라는 명칭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경찰의 탄압 중지, 남한의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수립 반대 그리고 통일 정부 수립을 촉구하면서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단체와 경찰서 등을 공격한 1948년 4월 3일을 특정하게 부각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관덕정 앞의 발포사건을 시작으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혹은 1957년 4월 최후의 무장대원이 생포될 때까지 근 7여 년 혹은 10여 년에 걸쳐 제주 전역에서 발생한 각종 사건들,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25,000∼30,000명의 인명피해를 불러왔지만 50년이 지난 21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거나 아직도 묻혀 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 전체를 가리킨다.

 

브루스 커밍스는 해방된 한국에서 제주만큼 정치적 갈등으로 고통을 겪은 장소는 없으며 4·3사건의 제주는 한국전쟁 이후 전개될 한국정치의 돋보기이자 현미경이라고 평가했다. 4·3사건은 세계냉전체제 하의 국가 세우기와 관련돼 있었다. 확고한 형태로 구축된 국가가 4·3사건과 관련됐다기보다 4·3사건을 통해 확고한 형태의 국가가 그 모습을 갖춰갔다고 할 수 있다. 육지에서 격절된 섬 제주는 오히려 국가 상상의 시험장이었다.

침묵과 관광
따라서 브루스 커밍스의 진단은 비단 4·3사건 자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4·3사건을 장악한 지배적인 담론은, 4·3사건을 남한을 거부하고 북한을 지지한 좌파의 반란으로 설명하는 폭동론이었다. 이 담론의 절대적인 위세로 인해 4·3사건을 재론하는 것은 금기가 됐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고무돼, 4·3사건은 북한을 지지한 좌파의 폭동이 아니라 한반도의 통일을 추구해 남한 단독 국회의원 총선거에 반대한 운동이라고 주장하는 항쟁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육지사람 혹은 지배층에게 있어 이 담론은 제주어만큼이나 이질적이고 생경해 소통도 공감도 할 수 없는 언어들이었고 그래서 삭제돼야 할 언어였다. 매끈하고 투명한 단성적인 언어는 국가의 전 지역을 체계적인 유기체로 재구성했고, 제주는 소통 가능한 언어를 학습해 조국근대화의 역군들에게 휴식과 위안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외화를 획득하기 위한 관광의 공간으로 지정됐다. 감귤산업과 더불어 관광산업은 제주경제를 지탱하는 두 주축이었지만, 관광이라는 소비형태에 내재돼 있는 근원적인 폭력성으로 인해 제주 특유의 자연ㆍ언어·풍속은 관광을 위한 경관들 즉 소비에 적합한 상품의 형태로 가공됐다. 낭만과 사랑의 섬이 관광지 제주의 이미지로 채택됐고, 이 이미지에 걸맞게 육지와의 차별성과 접근성을 겸비한 공간이 부각됐으며 관광객의 언어인 표준어가 강조됐다.

▲제주 4.3평화공원을 찾는 어린 학생들이 '백비'가 자리한 전시관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이 백비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고 설명이 붙어 있다.

제주어는 이국성과 신기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장치 정도로 활용될 뿐 관광객과의 소통을 위한 언어가 되지 못했다. 관광객과 ‘육지것들’에게 있어 4·3사건은 제주어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역사, 소비에 부적합한 불편한 역사였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귀양지 중 하나였고 일제강점기 중요한 병참기지였던 섬 제주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변모하는 과정은 제주어와 4·3사건의 침묵이라는 고통스런 과정을 동반했다.

국가와 제주, 뒤바뀐 용서-화해의 제안자
최근 들어 4·3사건은 제주 관광의 경로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제주4·3평화공원은 2011년 22만여 명이 찾았으며, 원래는 현기영문학관으로 기획됐으나 작가의 사양으로 조천읍 북촌리 민간 희생자를 기리는 시설물로 재조성된 너븐숭이 4·3기념관은 2011년 1만 5천여 명이 다녀갔다. 4·3사건에 대한 국가의 사과와 다크투어리즘의 부상은 양민학살론에서 비롯됐다.

기존 담론의 토대였던 정치성을 배제하면서 윤리성을 강조한 양민학살론은, 4·3사건을 가해자인 국가의 불법적인 폭력으로 인한 선량한 국민의 대량학살로 설명했다. 2000년을 전후해 4·3사건 진상규명에 대한 요구가 본격화됐다. 20세기의 사건을 21세기로 넘길 수 없다는 절박감과 양민학살론의 부상이 그 배경으로 작용했다. 제주사회는 화해와 상생의 가치를 제기하면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한편, 치유의 차원에서 평화의 섬 구상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21세기 초입에 국가는 공식 사과와 함께 제주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했는데, 지방자치단체 차원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평화도시를 지정한 것은 세계 초유의 일이었다. 그런데 국가가 평화담론을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면서, 용서와 화해의 제안자, 평화의 발신지였던 제주는 평화의식을 학습해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 “평화를 추구하는 보편적인 세계시민으로서의 덕성”을 구비해야 할 결핍된 존재로 간주되는 결과가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2002년 제주국제자유도시 특별법이 공포 발효됐고 2006년 특별법이 통과됐다. 국가연구기관의 신조어인 국제자유도시는 “사람, 상품, 자본 이동이 자유롭고 기업 활동의 편의가 최대한 보장되는 동북아 중심도시”으로 정의됐고, “한국경제의 보다 광범위한 개방 및 국제화·자유화의 교두보”로 규정됐다.

제주를 둘러싼 평화담론은 경제 개방과 긴밀하게 묶이면서 평화산업이라는 경제적 측면의 논의가 중심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제주지방정부 주도로 세계화ㆍ지방화 전략이 수립됐으며, 지역은 중앙정부의 말단이 아니라 국제교류의 최일선에 선 전위적인 존재로 간주됐다. 그 중 제주 국제자유도시 지정은 외환위기라는 충격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게 된 자본제적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응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 중 맨 앞자리에 위치했다. 자연이 아름다운 만큼 그 삶은 팍팍했다.

그래서 제주사회는 육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부격차가 적었으며 지역사회 특유의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4·3사건은 국가가 이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제주섬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즉 국가 수립과 변화를 증명하고 시험하기 위해 치유 불가능할 정도의 충격을 가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 위로는 국가·글로벌 차원의 정치ㆍ경제적 지층들이 켜켜이 덮여 있다.

 

조명기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ㆍ한국현대소설
부산대에서 박사를 했다. 「일상적 장소성과 관계적 공간성의 두 변증법」, 「김소진 소설에 나타난 도시 주변 공간의 로컬리티」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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