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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국가의 성장 동력으로 呼名된 공간 … 시민과 자본의 충돌 그 운명은?
근대국가의 성장 동력으로 呼名된 공간 … 시민과 자본의 충돌 그 운명은?
  • 교수신문
  • 승인 2013.04.2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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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20_ 부산항

 

▲ 19세기 후반 개항한 부산항은 역사의 시간 속에서 점차 확장돼 왔다. 그 속에 깃든 애잔한 삶의 흔적들은 파도의 포말처럼 부서져 내려 앉았다. 사진은 부산신항 전경. 사진= 임회숙·산지니 제공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개발 이익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토목 건축자본의 좋은 먹잇감으로 부산 북항 재개발이 부상하고 있다. 부산시는 재개발 회사를 만들어 매립공사를 거의 마무리했고, 연구자들은 라운드테이블에서 재개발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북항 재개발의 큰 흐름은 여전히 안개속이다.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돌려주자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각종 자본을 투자해 경제이익을 거두자는 논리가 맞서 있다. 1902년 북항매축을 신호로 자본과 국가의 소유물이었던 부산항이 110여 년 만에 부산 사람들에게 되돌아올 기회를 잡았지만, 시민과 자본 모두 쉽게 양보하지 않을 형세다.

1876년 근대 개항으로 일본인들이 부산으로 들어와 살기 전의 부산 바다는 부산 사람들의 삶터였다. 『숙종실록』에는 부산의 바닷가 여자들이 생선을 잡아 초량 왜관에 살고 있던 일본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다는 사료가 확인된다. 부산항에서 낚아 올린 생선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는 부산 사람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부산포초량화관지도」(19세말)에 그려진 부산항 앞바다에서 조업하는 어선과 어장들의 모습은 부산항이 부산 사람들에게 아주 친숙한 공간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조선 제일의 근대적 항만 장치
20세기 접어들어 일본이 조선 지배를 확실시 해 가면서 일본 기업이 바다를 매립하고, 조선총독부가 항만시설을 관리하면서 부산항은 완전히 접근이 차단돼 버렸다. 매립된 땅에는 부산역과 세관이 유럽풍의 웅장한 위엄을 드러냈고, 부두가 하나 둘 만들어져 일제 말까지 4개가 설치됐다. 부산역전에 설치된 시계는 부산 사람들에게 근대적인 시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따르도록 만든 근대적 기계장치였다. 부산부두 입구에 만들어진 세관은 허가받은 사람들만 출입할 수 있게 통제됐다.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들어온 관부연락선은 부두까지 이어진 철로를 이용해 만주 봉천까지 한 숨에 내달릴 수 있었다. 부산항은 일본이 조선과 만주를 지배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단축시키는 역할을 했다. 물자와 인력, 정보를 빠르게 이동시켰다. 조선을 빠져나가 일본 하층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는데 기여한 조선산 미곡, 일본 공업지대에서 생산돼 조선 시장을 장악하는 일본산 공산품들이 부산항을 거쳐 갔다.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일본 천황의 명령을 받고 어깨에 힘을 잔뜩 넣고 들어오는 식민자들과 근대문화를 배워보겠다고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유학생들도 부산을 거쳐 오고갔다.

▲ 부산포초량화관지도 일부. 부산항이 전통시대부터 부산사람들에게 친숙한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일제말기 징용, 징병, 위안부 등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된 조선인들이 연락선에 실려 나갈 때는 식민자들의 가장 약탈적인 모습을 경험하기도 했다. 한편 부산은 식민지 질서를 강요하는 힘과 이것을 피하려는 세력이 충돌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당시 언론보도에 비친 부산항은 이곳을 통과하려는 조선인과 이들을 통제하려는 일본 경찰 사이의 갈등으로 묘사되곤 했다.

사기사건, 절도사건, 불법도항 등과 관련된 내용은 당시 부산항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였다. 식민지 지배로 인한 농촌경제의 파탄,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려던 조선인 농민들은 부산에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다. 언론에서 보도되고 있던 다양한 사건은 제국주의 경찰의 감시와 이를 뚫고 나가려는 조선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충돌의 증거들이었다.

감시망에 묶여 부산에 눌러 앉아 도시빈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조선인에게 부산은 항상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부산항은 근대문화가 가장 먼저 상륙하는 곳이었다. 부산의 조선인들은 비록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기는 하지만 교통, 위생, 경관, 상품 등에서 근대경험을 그 어느 곳보다 빨리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생활공간으로서의 의미 탈색
해방이 되자 부산항은 기가 죽은 일본인들이 돌아가고, 희망을 안고 돌아오는 귀환동포들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변했다. 한쪽은 실망을 다른 한쪽은 희망과 기쁨을 만끽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부산항은 여전히 미군정, 한국정부가 관리하는 중요한 ‘시설’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을 도우겠다고 미국편에 서서 한반도 땅을 밟은 외국 군인들과 이들을 지원할 원조물자들로 부산항은 또다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하루 끼니를 찾아다니는 피난민들에게 부산항은 생명선과 다를 바 없었다. 좋아하는 막걸리값이라도 벌기 위해 부두노동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됐던 화가 이중섭의 이야기도 이런 분위기에서 나왔다. 1960~1970년대 부산항은 국가의 요청에 따라 조국근대화를 위해 헌신했다. 달러를 벌기 위해 외국으로 실려 나가는 수출품들이 부산항을 통과했다.

국내 공장을 가동시킬 원료도 부산항을 경유했다. 우리나라 최대의 무역항이 된 부산항은 밤낮없이 오르내리는 하역작업으로 분주해졌다. 부산항이 국가를 위해 바친 충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964년부터 시작된 월남파병이 장엄한 의례와 함께 3부두에서 진행됐던 것이다. 외화를 벌기위해 떠나는 마도로스들을 태운 원양어선도 희망을 품고 오륙도를 지나 大洋으로 향했다. 경부선, 경부고속도로와 부산도시고속도로는 부산항을 대한민국의 항만으로 만들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부산사람들에게 부산항은 중요한 밥벌이가 됐다. 밀물처럼 밀려들어온 이들은 부산항 뒷산 중턱까지 안식처를 만들며 부두노동자로 열심히 살았다. 이른바 부산의 ‘산동네’가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해 이 무렵 거의 완성됐다. 부산항의 발달은 아이러니하게도 산동네에 뿌리를 내려왔던 부두노동자에게는 또 다른 상실의 과정이었다.

어마어마한 기중기가 등장해 물동량을 늘리는 만큼 부두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됐다. 부산항이 근대국가에 훌륭한 성장 동력이 되는 만큼 부산 사람들의 생활공간으로서 부산항은 의미를 잃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북항재개발사업은 부산항을 또다시 국가와 자본의 바람과 부산 사람들의 권리가 충돌하고 있는 갈등의 공간으로 몰아가고 있다. 북항재개발사업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


 차철욱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조교수
필자는 부산대에서 박사를 했다. 한국현대사가 전공이며, 논문으로는 「한국전쟁 피난민과 국제시장의 로컬리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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