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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뛰어넘어 새 패러다임 제시 … 혁신적 세계관 정초”
유학 뛰어넘어 새 패러다임 제시 … 혁신적 세계관 정초”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3.03.18 16: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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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애와 평등-홍대용의 사회사상』 박희병 지음|돌베개|488쪽|25,000원

▲ 담헌 홍대용
저자 박희병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삼십대 후반인 1990년대 초에 홍대용을 만났다. 그 당시 나는 학문의 목적 및 방법과 관련해 큰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다. 기존의 학문 패턴을 탈피해 학문의 틀을 새롭게 定礎하고 싶다는 욕구는 강했으나 암중모색만 했지 길을 찾지는 못하고 있었다. 내가 홍대용의 『湛軒書』를 읽은 것은 바로 그 무렵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비로소 길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한 걸음씩 앞으로 전진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의 그런 20년에 걸친 학문적 고민이 한 걸음씩 전진해나간 하나의 결과물이자, 이정표인 셈. 이 책이 문제적인 것은 18세기 한국사상사의 주요한 한 축인 홍대용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저자 스스로 말하듯, 홍대용의 사상이 그 실상에 걸맞게 제대로 평가받고 있지 못한 학계 실정에서 나온 저작이어서도 아니다. 이 책의 ‘문제성’은 담헌의 사상이 구축돼 가는 방식을 눈여겨보면서, 동아시아 사상사의 관계망 안에서 그의 사상적 독자성을 파악하고자 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동아시아 사상사라는 관계망
담헌 사상의 마지막 단계에서 제출된 『임하경륜』, 『의산문답』(저자에 의하면, 앞의 책에는 담헌의 사회정치적 견해가 제시돼 있으며, 뒤의 책은 인간과 자연과 세계에 대한 전연 새로운 기획, 새로운 사유들이 원리적으로 모색되고 있다)을 중점적으로 검토한 후 그의 사상 형성 계기를 유형원과 이익, 묵자, 일본에 대한 傳聞 등에서 찾아낸 저자는 “자기 시대의 핵심적 과제를 회피하지 않고 그에 정면으로 맞서 대결했으며, 금기나 성격을 뛰어넘어 자신의 논리와 사유를 그 극단까지 밀고 나간 측면”과 “특정한 사상에 구애되지 않고 여러 사상을 ‘公觀倂受’하면서 창조적·원리적으로 새로운 진리를 구성해 나간 면”을 읽어냈다. 저자는 담헌의 이런 면을 두고 “이런 기백, 이런 용기 있는 자세와 개방적이고 활달한 태도로써 그는 낡은 질서를 부수고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평가하면서, “비판과 자율성, 용기와 기백을 잃어버린 오늘날 이 땅의 학자와 지식인이 깊이 음미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라고 지금 이곳의 문제로 환기한다. 저자 역시 담헌을 ‘북학파’의 일원으로 이해하고, 洛論계열의 학자로 파악해 왔기 때문에 이번 저작은 여러모로 논쟁적이다.

통설에 대한 도전이자 자기 견해의 비판과 수정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는 먼저 이렇게 말한다. “근래, 주로 성리학-洛論과의 관계 속에서 그의 사회사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그런 접근법에 동의하지 않고 홍대용 사상의 형성 계기를 좀 더 다면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저자가 새롭게 읽어낸 담헌 사상의 형성 과정에는 莊子와 墨子가 중요하게 작동한다. “특히 홍대용 사회사상의 숙성 과정에는 묵자가 대단히 중요한 因素다. 그럼에도 이 점에 대한 해명은 종전에는 없었다.” 눈 밝은 독자라면 책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汎愛’는 묵자의 ‘兼愛’를 개념적으로 확장한 것이다.

저자가 제목으로 내놓은 이 ‘범애’야말로 그의 담헌 읽기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범애는 평등과 깊숙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묵자는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에서는 이단 중의 이단으로 간주됐다. 유가들은 왜 墨家를 배척하고 미워했을까. 그가 겸애를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유가의 본령은 ‘差等愛’에 있는데, 묵자의 겸애는 차별 없는 사랑, 곧 ‘平等愛’였기 때문이다. 홍대용은 겸애를 진리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묵자가 말한 겸애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한정되지만, 담헌은 이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더 나아가 ‘사람과 사물(즉 자연)’의 관계 및 ‘自族과 他族’의 관계로까지 확장시켜 놓았다.

 

이 책의 ‘문제성’은 담헌의 사상이 구축돼 가는 방식을 눈여겨보면서,

동아시아사상사의 관계망 안에서 그의 사상적 독자성을

파악하고자 한 데서 찾을 수 있다.

 

“‘汎愛’라는 말은 홍대용에 의해 확장된 이 새로운 겸애를 지칭한다. 사회와 자연을 아우르는 홍대용의 도저한 평등사상의 배후에는 바로 이 ‘범애’라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홍대용의 사상은 성리학은 말할 나위도 없고 기존의 유학을 뛰어넘는 면모를 지니게 됐으며, 인간학과 자연학, 그리고 사회철학에 있어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면서 浩瀚하고 혁신적인 세계관을 정초해 낼 수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홍대용 사상을 가리켜 사상의 스케일과 창의성은 조선에서는 물론 근세 동아시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으로 高評했다.

특히 저자는 홍대용을 북학파의 일원으로 간주해 왔던 기존 통설과 자신의 견해에 도전 스스로 ‘통설을 뒤짚었다고 밝혔다. “박지원이나 박제가가 대체로 生産力의 향상에 치중한 개혁론을 주장했다면, 홍대용은 그와 달리 사회적 관계의 평등을 提高하는 데 중점을 둔 개혁안을 구상”했다고 말하는 저자는 “北學論은 비록 현실적이기는 하나 그 논리구조가 퍽 단순한 데 반해, 홍대용의 사회사상은 대단히 심오하다”라고 지적한다. 새로운 사상의 관계망 속에서 담헌을 읽어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사회평등 겨냥한 사상의 지향점
그래서 저자는 담헌 사상을 낙론에서 떼어내 분석했다. 담헌의 사상을 낙론과의 연관성 속에서만 규정해서는 담헌이 당대 조선, 나아가 동아시아의 사상적 지형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이룩해 간 사상 형성 과정과 그 사상의 독특한 內質이 정당하게 포착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담헌 사상의 낙론적 기초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주체적 대응 내지 고투가 捨象되고 만다.

그 결과 담헌 사상은 ‘북학사상’으로 잘못 단순화되거나 박제화돼 버리며, 北學論을 전개한 박지원이나 박제가의 사유와 대동소이한 것으로 이해되고 말게 된다.” 저자가 보기에 담헌은 박지원, 박제가의 연암학파로 묶기기에는 그 지향하는 사상의 지향점과 內質이 너무 달랐다. 세 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 ‘華夷論’에서 구별된다. 둘째 문명과 물질적 가치를 보는 관점상에서 구별된다. 셋째 사상의 지향점에서 구별된다. 사상의 형성과 발전이 근소한 차이, 즉 유니크한 측면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저자에 따르면, 담헌 사상의 지향점이야말로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유가의 틀에 머문 燕岩이나 楚亭과는 달리 담헌은 유학 외부의 여러 사상을 이단으로 배척하지 않고 자신의 사유 속에 적극적으로 포섭하는 태도를 보였다. 『의산문답』을 면밀하게 읽어낸 저자는 담헌 사상의 지향점을 가리켜 “특히 묵자의 평등과 겸애의 사상을 공관병수해 이를 토대로 새로운 세계관과 사회적 원리를 이념적으로 창조해내고 있음은, 종래에는 간과돼 왔지만,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라고 의미 부여했다. 결국 담헌의 사상은 유가에서 출발했지만, 유가라고만 할 수 없는 독특한 사유 체계를 구성한 것으로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저자의 말대로 “담헌은 몇 개의 고개를 넘어 마침내, 적어도 사유에 있어서는, 당대 밖으로, 즉 체제 밖으로 훌쩍 나가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학계의 홍대용 읽기는 이제 막 새로운 단계로 도약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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