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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팜므파탈에 대한 남성의 공포
문화비평 : 팜므파탈에 대한 남성의 공포
  • 김진호 목사
  • 승인 2002.08.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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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31 14:39:44
김진호
목사·당대비평 편집위원

지난 8월 1일 저녁 9시 뉴스. 하나같이 재미없는 것들 뿐이라 졸음을 참고 있던 중에, 두 편의 연이은 보도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첫 번째는 자녀와 함께 가출하여 보호소에 있던 여인이 아동보호상담소의 중개로 남편과 면담도중 살해됐다는 내용의 보도였고, 둘째는 아내가 남편에게 쥐약을 먹여 살해하려다 기소됐다는 내용이다.

아내 살해 보도는 놀랍게도 무인카메라에 녹화된 살해장면의 일부를 모자이크 처리한 채 그대로 방영했다. 희미해서 그 자체만으로는 정황을 추측하기 쉽지 않은 장면이었지만, 설명과 함께 보면 실제의 살해 장면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을 만큼 소름끼치는 보도였다. 방송의 센세이셔널리즘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례였다.

아무튼 이러한 강렬한 보도에 바로 이어지는 두 번째 기사는 필경 앞의 보도에 영향을 받은 듯 했다. 뉴스 편집자는 흉측한 이미지의 악녀 형상의 삽화까지 넣어가며 시청자의 가치판단에 개입하려 했다. 영상으로 내보낼 거리가 없어서 삽화가 필요했던 것은 분명 아니다. 카메라는 수갑을 찬 여인이 고개 숙이고 있는, 죄수의 전형적 장면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변조되지도 않은 그녀의 육성을 그대로 내보낼 만큼 시청각적인 연출은 부족하지 않았다.

뉴스 편집자의 의도가 성공한 탓인가, 나는 실제의 살인 영상을 보는 것보다 삽화의 흉물스러움에 더욱 자극을 받고 있었다. 마치 국가보안법에 기소된 사람을 괴물적 이미지로 묘사했던 지난 군부독재 시절의 텔레비전을 연상시키듯 기소된 여자의 삽화적 이미지는 충분히 괴기스러운 모습이었다. 이러한 영상을 배경으로 하면서 발설되는 기자의 멘트는 2년 반 동안 무려 16차례에 걸쳐 용의주도하게 술과 음료수에 쥐약을 타서 먹였던 비정한 아내와, 시름시름 앓다가 소장까지 절제하고도 병원을 전전하고 있는 기구한 남편을 대비시키려는 듯이 보였다. 스릴러 영화의 악녀에 대한 섬뜩한 공포심을 자극하려는 듯, 이 보도 편집 속에는 아내 살해의 현장까지 방송된 남자보다, 살인 미수에 그친 여자가 더욱 악마적으로 보일 만큼 강렬한 메시지가 스며있었던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보도자의 연출로부터 거리를 두려 방어자세를 취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터득해온 뉴스 시청법에 따르면 이 보도 장면은 비판적 시선을 예리하게 번뜩거려야 하는 상황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이 두 사건이 모두 그 배후에 남편에 의한 상습적 가정폭력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데 나는 두 번째 보도에서는, 하마터면 이 사실을 감지하지 못한 채 사건을 기억할 뻔했다. 성차별주의 혐의가 농후한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기자의 해석에 의하면, 보도자는 어떤 형태로든 사건을 상품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자신의 상품 가치를 나타내기 때문이라는 게다. 보도자의 욕망이 사실을 리포트해야 한다는 직업의식과 복합되어 기사가 만들어지게 된다는 얘기다. 그의 해석대로라면, 이 보도 속에는 공공연한 의도가 개입된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좀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생각하게 됐다. 상습적 가정 폭력의 희생자인 두 여자가 상반된 태도로 반응했다는 사실이, 내가 보기엔 문제의 실마리였다. 한 여자는 도피라는 수동적 행위를 선택했다. 반면, 다른 여자는 보복이라는 적극적 행동을 기획했다. 그런데 보도자의 편집을 거치면서, 수동적 여자는 동정의 대상이 되고, 그녀를 잘 보호하지 못한 우리의 공동책임의 영역으로 사건이 다뤄졌다. 반대로 적극적 여자는 증오의 대상이 되고, 사건의 배후 일체를 악녀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증오로 대체시켜버렸다. 유일한 원인은 그녀의 본원적 악녀성 때문이라는 뉘앙스가 은폐된 메시지로서 사람들에게 감지됐던 것이다.

한 여성학자에 의하면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란, 세상을 향해 적극적인 보복을 실행하는 여자에 대한 남성 상상계의 공포적 환영의 소산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쥐약 살인 미수 사건의 보도에서 여자에 대한 증오심이 강렬한 메시지로서 우리에게 읽혔던 것은, 기자와 남성 시청자의 무의식적 팜므 파탈 공포증의 소산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악녀에 대한 증오심은, 남성적 시선으로 구성된 사회적 공모의 결과라는 것이다.

억측인지는 몰라도 내 생각에, 만약 보도자가 성찰적 지식인이었다면 그의 기자적 순발력은 가정 폭력과 살인 미수 사이의 상호폭력의 논점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는 방향으로 작동됐어야 했다. 만약 우리 사회에 성찰적 지식인이 존재한다면, 악녀에게 모든 문제를 돌려버리는 대신 폭력과 대응폭력의 긴장 속에서 사건이 단순화되지 않도록 다양한 시선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려고 해야 했다. 한데 본원적 악마성을 지닌 악녀들은 죄를 지고 화형대 속으로 끌려가고 있고, 언론을 포함한 대다수 지식인은 그런 인식의 장치에 눈감고 있거나 현란한 수사로 공조하는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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