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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_ 백낙청과 김지하
원로칼럼_ 백낙청과 김지하
  • 박찬부 경북대 명예교수·영문학
  • 승인 2012.12.24 15:2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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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부 경북대 명예교수·영문학

선거의 열기가 전국을 강타하던 가운데 시인 김지하가 한 시평을 통해 평론가 백낙청에게 날린 돌직구성 직격탄은 단순히 문학계 두 ‘원로’의 부딪힘이라는 차원을 넘어 한국의 문화담론 헤게모니 쟁탈전까지를 떠올리게 하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12월 4일, <조선일보> 칼럼).

김지하는 ‘한류-르네상스’의 도도한 흐름을 가로막는 ‘독초, 독거미풀, 쑥부쟁이’로서의 ‘깡통’ 지식인 백낙청에 대해 그가 왜 한국문화계의 원로로 대접받을 수 없는가, 그 이유를 10개 항의 불가론을 통해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이 불가론을 한마디로 줄이면 ‘反知性’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표현은, 오래전에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 김우창 교수가 백 교수의 비평담론을 점검하면서 그의 비평 태도를 ‘반지성적’이라고 뜻매김한 데서 유래했다.

백낙청은 한국의 현대비평사에서 역설과 모순어법의 화신으로 살아왔다. 고관대작 가문의 후예답게 그는 한국전쟁의 참화로 전 국토가 초토화돼 온 국민이 초근목피로 연명할 때 그 비싼 돈 들여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미국 대학 중에서도 등록금 비싸기로 유명한 브라운 대학, 하버드 대학을 거쳐 영문학 Ph.D를 들고 20대 약관의 나이에 서울대 영문과 교수로 입성한다. 누가 봐도 그것은 상류사회의 엘리트 코스요, 귀족 패밀리의 행차요, 부르주아의 축제 행렬에 다름 아니었다.

어떤 ‘죄의식’에서였을까. 참여문학을 표방하는 <창비>를 창간하면서 그가 던진 화두는 놀랍게도 서민, 민중, 민족, 변두리 삶, 농촌문학 등 이른바 ‘좌파 문학론’이었다. 그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세력들에게는 ‘촌놈 겁주지 말라’고 일갈해 일언지하에 적을 제압하는 완력을 보였다. 누가 ‘촌놈’인가. 그는 항상 독자들을 헷갈리게 했고, 언제나 자신에게 기대될 수 있는 것의 반대편에 서서 사고하고 행동했다. 당대 최고 ‘지성인’의 이런 ‘반지성적’ 행보 때문에 그는 역설적으로 암울한 시대에 빛나는 별이 됐다. 그리고 그는 별이 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선거철에는 그가 항상 정면에 등장한다. 지난 총선에서도 그랬고 이번 대선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재야 원로모임인 ‘희망2013·승리2012 원탁회의’의 좌장격인 백낙청이 야권 후보 단일화를 위해 일할 때 그의 머릿속에는 노무현정권 시절 남북 무슨 위원장 자격으로 평양 광장에서 연설했을 때 봤던 수많은 관중들의 열광하는 모습이 어른거렸던 것일까. 이런 광경을 연상하고 김지하는 종북 좌파의 ‘깡통 빨갱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것이다.

해체론적 글읽기에 ‘독서의 전이적 구조’라는 표현이 있다. 텍스트의 독자는 텍스트성에 전이적으로 연루될 수밖에 없어 그 텍스트의 ‘밖’에 서서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글쓰기와 글읽기의 문제에 대해서 탁월한 안목을 지녔던 현대의 대표적인 두 지성들조차도, 라캉이 포의 텍스트를 독서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데리다가 라캉의 텍스트를 독서하는 과정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독서의 전이적 구조가 벌여놓는 언어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시인 김지하는 비평가 백낙청을 비판하면서 그 비판의 글 속에서 자신의 삶의 주제를 전이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두 사람은 여러모로 닮았다. 우선 저항시인 김지하의 출세작 「오적」 시는 참여문학의 정수였다. 그리고 그가 시적 성장의 토양으로 삼았던 공간이 참여문학의 정론지 <창비>가 아니었던가. 글쓰기의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와 형식면에서도 두 사람은 꼭 닮았다. 단선적이고 안하무인격인 공격형 말투, 도처에 산견되는 논쟁적 어법 구사 등이 그렇다. 전자는 후자의 비평 행위를 ‘공연한 시비’로 단죄하고 그것을 ‘너절하고 더러운 방담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폄훼했다. 그리고 ‘개 똥구멍 같은 온갖 개수작들’과 같은 거친 표현과 날선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후자의 비평담론에서도 있을 법한 어법과 표현들이다.

정신분석 용어에 ‘적대적 동일시’라는 개념이 있다. 미워하며 닮아간다는 말이다. 백낙청의 비평담론을 전이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김지하의 ‘쑥부쟁이’론은, 텍스트를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어떠한 힘의 논리도 패배로 끝나게 한다는 해체론적 글읽기와 독서의 전이적 구조를 실천적으로 보여준 좋은 사례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박찬부 경북대 명예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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ㅉㅉ 2013-01-03 01:15:33
일단 뭔소리를 하는건지 모르겠다. 논지도 없고 주장도 없고, 그냥 듣보잡 교수가 김지하랑 백낙청이 붙은걸 핑계로 둘다 까내리면 자기가 좀 돋보일줄 알고 쓴 글로밖에 안보인다. 이런 인간이 교수노릇하는 학교는 도대체 뭐냐?

과객 2012-12-30 00:57:14
지식종사자들의 말폐가 바로 이런 것이다.... 싸잡아 욕하는 것.....영문과 명예교수 정도 되신다고 하니 백낙청의 글깨나 읽어보셨을터이고, 김지하의 글도 정독하셨을터인데, 제대로된 비판,비교가능하실법도 한데......그냥 근거도 대지않는 인상론적인 궁시렁으로 글을 마치시는군요.....아니 시작한것만 못한 산만한 문체로 말입니다....이런 글로 평생을 살아오셨는지 몰라도 기회가 되면 제대로도 텍스트 비평 좀 해 보시죠...석사과정 리포트도 이 따위로 썼다간 낙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