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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 전공자도 국한문 혼용 읽기 불편하다면
법학 전공자도 국한문 혼용 읽기 불편하다면
  • 김동훈 국민대·법학
  • 승인 2012.11.12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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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_ 한글전용정책 위헌 헌법소원을 보고

김동훈 국민대·법학
최근 ‘어문 정책 정상화 추진회’라는 단체가 국어기본법의 한글전용정책이 위헌이라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다고 한다. 심판 청구서에서 이들은 “한글전용·한자배척의 어문정책과 교육정책으로 인해 수천 년간 내려온 우리말 한국어가 그 온전한 모습을 잃어감에 따라 국어생활과 정신문화가 황폐화되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위기감에서” 헌법소원을 내게 됐으며 “우리말의 한자어는 원칙적으로 한자라는 글자로 적고 그 한자로 적힌 한자어를 한국어의 발음으로 읽어야 그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 주장의 핵심이 ‘우리말 한자어는 원칙적으로 한자로 적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절대 반대다. 이미 갑오개혁 때 공문서를 국한문 혼용으로 하기로 한 지 몇 년 만에 순한글로 된 <독닙신문>이 나오면서부터 큰 흐름은 정해진 것이었다. 한자는 우리의 문자가 아니고 한글은 한자를 완전히 대체하기 때문이다.

한글화가 가장 늦은 분야인 법학서적에서도 보면, 내가 대학 때 보던 책에는 적지 않은 한자가 박혀있었다. 특히 목차 등은 조사만 빼고 다 한자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천천히 전문용어를 빼고는 한자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10여 년 전부터는 적어도 본문에는 100% 한글화가 이뤄졌다. 그리고 한 5년 전부터는 목차나 소제목 등에서도 한자가 사라졌다. 지금은 책의 제목 ‘민법총칙’등도 한글이다. 법전도 90% 이상의 법률은 원문이 한글이고 다만 소수의 기본법률만 아직 국한문 혼용체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도 이미 학생들이나 사용자는 순한글 법전을 사용하고 있어 조만간 한글화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순한글화가 가능한 것은 무엇보다 한글의 완벽한 표음력과 조형성 때문이다. 표음력이란 소리로써 의미를 구분하는 능력이다. 초성·중성·종성의 3단계 조합을 하는 한글은 수천 개의 구분되는 음절소리를 만들어내는데, 이는 오십음도로 이뤄지는 음절문자인 일본어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한자어의 음으로 사용되는 음절만도 500개는 된다. 이런 음절이 2개 이상 모여 단어를 이루는 것이어서 웬만해서는 동음이의어가 발생하지 않으며, 있다 해도 문맥상 자연스럽게 구별되는 것이다. 수많은 법률용어 중에서 간혹 음이 중복되는 예로는 사법(私法, 司法), 과실(過失, 果實), 보수(補修, 報酬) 등이 있지만 그리 불편함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또 조형성이라 함은 이른바 모아쓰기를 통해 한자의 한 글자에 대해 역시 한 글자의 대응형태를 갖춤으로써 완벽하게 한자를 대체하게 되는 것이다.

전공자인 나부터도 이제 한자가 박힌 국한문 혼용문을 읽는다는 것은 점점 불편한 일이 돼 가고 있다. 이는 마치 한글과 영어를 섞어 쓰는 글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다. 2개 이상의 문자를 오가면서 오히려 가독력도 떨어지고 피로감이 가중된다. 결국 사용자 입장에서는 순한글화가 맞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혼용론자들의 주장 중 교육과정에서 적절한 시기에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우리 말 단어가 어떠한 한자어의 소리를 따온 것이고 그리해서 이러한 뜻을 갖는다는 것을 아는 것은 영어권 사람이 영어단어의 라틴어나 그리스어 어원을 아는 것하고 비슷하면서도 그 이상의 본질적인 인식의 확대를 가져오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베트남어도 오랫동안 한문의 영향을 받아서 어휘의 절반 이상 특히 추상적인 개념어들은 다 한자에서 온 것이어서 사전의 표제어에는 소리를 적는 로마자 국어 뒤에 한자표기를 해 놓았다. 그런데 사회주의권 하에서 이러한 연결고리가 완전히 단절돼 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쓸 줄도 모른다. 심지어 베트남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 ‘깜언’이라는 말은 감사하다는 말인데 한자의 ‘感恩’에서 온 말이지만 이러한 어원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이것은 결국 뿌리 뽑힌 문화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요약하면 바람직한 언어생활은 우리가 쓰는 단어들 중 한자어원을 가진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구별 정도는 하면서 일상에서는 오로지 한글로 문서 활동이나 고급의 학문 활동도 하고, 다만 한글소리만으로 의미에 약간 혼란이 있을 수 있거나 추측을 요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해주는 정도가 현 시점에서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김동훈 국민대·법학
독일 쾰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법대 학장을 지냈으며, 시민단체 ‘학벌없는사회만들기’에서 사무처장을 맡기도 했다. 『 대학이 망해야 나라가 산다』, 『한국의 학벌, 또 하나의 카스트인가』, 『교육을 말하다』 등 여러 권의 교육평론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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