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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설치미술의 復權
‘키치’ 설치미술의 復權
  • 교수신문
  • 승인 2012.09.17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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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2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비엔날레 전시가 9월 초에 광주에서 개막했다. 9월 둘째 주에는 한국미술 아트페어(KIAF, the Korean International Art Fair)가 열렸다. 과거와 달리, 한국미술계는 이제 국제전을 기획하는 노하우 등이 축적돼 국제성을 지향하는 한국현대미술이 동시대적으로 해외에 소개되고, 해외 기획자들도 2년에 한번 9월이 되면 한국을 많이 찾아온다.

1990년대 이후 한국미술은 서구의 현대미술과 동시대성을 얻었으며, 동양과 서양이라는 지형적 구분도 이제는 고리타분하게 들릴 정도로 동양현대, 서양현대라는 이분법적인 구분도 전혀 의미가 없어 보인다. 한국의 현대미술을 보기위해 해외의 미술관계자들이 우리를 찾아오고, 김수자, 서도호, 이불, 양혜규 등이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모습도 자랑스럽다.

한정된 예술가들의 특권
이런 국제전을 가면 ‘설치’미술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설치미술이라는 영역 자체는 모더니즘 예술이 주장하던 고급예술(회화, 조각)과 저급예술(포스터, 광고, 디자인 등)의 구분에 대한 저항의 형식으로 1920년대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이나 1930년대 후반 마르셀 뒤샹이 기획한 ‘초현실주의’ 전시에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일시적인 전시, 설치 등을 강조한 이유는 ‘소장할 수 없는’ 유형의 예술에 매력을 느꼈고, 특히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은 정치적인 무정부주의를 외치며 반부르주아적인 예술형식을 새롭게 시도해보기 위해 실험적으로 해본 전시 디스플레이 방식이었다.

그러나 ‘설치미술’이라는 것이 예술비평 용어로 사전에 실린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설치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 비평 내에서 매체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매체로 소개됐고, 특히 젊은 작가들은 한 매체에 만족하지 않고, 회화, 조각,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섭렵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특히 융복합을 강조하는 시대에, 이러한 설치미술이나 ‘인터미디어’라는 말은 시각예술의 범주를 넘어, 음악, 연극, 퍼포먼스 등이 결합되며 더욱 생동감 있는 예술형식으로 수용되고 있다. 이는 사진, 영상이미지, 사운드 아트, 비디오 아트, 뉴미디어 아트 등을 포용했으며, 큐레이터들은 이를 전시담론 속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설치미술의 문제는 자본이다.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설치미술은 거대기업의 자본과 함께 미술과 기업의 컬레보레이션은 과거에 비해 더욱 가시화됐다.

루이뷔통, 프라다 등이 주도했던 예술후원 프로젝트들은 일본의 타카시 무라카미와 같은 미술가들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지만, 한정적인 예술가들만이 그러한 특권을 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을 대안적인 개념 없이 비판할 수만도 없다. 현대미술비평가인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작년에 출판한 책(『Under the Cup』)에서 흥미로운 구절이 눈에 띄었다. 크라우스는 책 집필의 동기를 “이른바 설치(installation)라고 불리는 천박한 미술의 스펙터클을 보고 분노를 금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글의 서두에 기술한다.

설치를 ‘키치’라 논하며 ‘가짜’이자 ‘사기’라고 칭한다. 그는 서슴지 않고 설치미술이 이젠 모든 국제전과 비엔날레의 단골메뉴가 된 국제적인 현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비평(특히 제도비판과 장소특정형 미술)이후, 최악의 골칫거리가 됐다고 꼬집는다. 즉, 설치와 인터미디어(intermedia)는 자본주의에 봉사하는 예술로 전락하고 말았다. 상당히 냉소적인 어조이지만, 해외 비엔날레와 같은 전시들이 점차 아트페어처럼 변해가는 최근의 변화에서 크라우스의 비판은 냉철한 비평가의 어조를 띤다.

미래의 비전
크라우스는 사진을 예술적 매체로 끌어올린 포스트모더니즘 비평가로, 그는 사진 매체와 개념미술의 등장을 가장 우수하게 평가한다. 그는 여전히 사진매체를 절대적으로 높이 평가하지만, 매체의 특수성이 와해되는 설치미술의 현상이 꼭 바람직하지는 않다는 눈길을 제시한다. 그러나 다양한 매체를 포섭한 설치미술의 매력은 이제 거부할 수 없는 현대미술의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모든 국제전에 등장하는 문화적 스펙터클이 됐지만 관객 지향적이고 참여지향적인 설치미술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설치미술이 애초에 추구했던 원형의 정신을 더듬어 보는 일, 비엔날레가 애초에 출발한 미션을 되새겨보는 일, 우리의 선배들이 실험미술을 통해 제기했던 개념들을 다시 읽어보는 일.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미래의 비전을 설정할 때가 왔다.


정연심 홍익대·미술비평
필자는 미국 뉴욕대에서 박사를 했다. 논문으로 「페르낭 크노프의 상징성과 벨기에 내셔널리즘」, 역서로는 『린다 노클린, 절단된 신체와 모더니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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