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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어디로 가시는가 …’ 감방 어디선가 환청이 들려왔다
‘여보게, 어디로 가시는가 …’ 감방 어디선가 환청이 들려왔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2.08.27 18:2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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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현장 스케치_ 소슬한 기억의 집,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사상과 행위, 신체를 가로막았던 형무소 외벽

 

8월 폭염이 수그러들자 비가 계속 이어졌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옛 현저동 101번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도 비가 내렸다. 일제가 철권통치를 위해 조성했던 옛 감옥 옥사 가운데 일부는 지금 사라지고 없다. 그 자리에는 붉은 벽돌로 터를 復碁한 표시만 남아 있다. 붉은 벽돌은 분명하고 뚜렷한 기억의 공간을 불러내고 있었다. 서대문형무소는 알려진 대로 1908년 10월 21일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으로 개소됐다. 개소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근대식 감옥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맞서 싸운 한국민을 저지하고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감옥 시스템은 광복 후에도 이어져 1987년까지 존속했다.

1945년 광복으로 서대문형무소는 11월 21일 서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로로 개명됐다. 1987년 11월 15일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간 뒤 1988년 문화재청에서 제 10·11·12옥사와 사형장을 국가사적 324호로 지정했으며, 1998년 서대문구에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대문형무소는 시기별로 두 가지 기능을 소화했다.

일본이 패전하기 전까지는 독립운동가들의 신체와 사상을 감금하는 형태로, 그리고 광복 이후에는 주요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격리, 위협하는 형태의 역할이었다. 심훈, 유관순, 이재유, 이병희, 한용운 그리고 도예종, 이돈명, 이영희 등을 비롯한 수많은 민족지사, 민주화 인사들이 이곳과 얽혀 있다. 한용운은 「눈오는 밤」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四山圍獄雪如海 감옥 주위 사방 산에 눈이 잔뜩 쌓였는데/ 衾寒如鐵夢如灰 쇠처럼 찬 이불 속에서 꾸는 꿈은 싸늘하네/ 鐵窓猶有鎖不得 쇠창살도 꽉 닫히지 않은 틈이 있는 탓에/ 夜聞鐵聲何處來 한 밤중에 어디선가 찬 소리가 들려오네.” 소설가 심훈 역시 이런 기록을 남겼다. “어머니!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 비가 내리는 날인데도 역사관을 찾는 발길이 계속 이어졌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옥중에서 어머니에게 올리는 글월」 중에서) 특이한 것은 이곳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내부 전시 방식이다. 현재 남아 있는 옥사 내부를 민족독립운동, 유신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을 조명하는 전시실로 운영하는 것은, 과거를 성찰함으로써 현재와 미래를 새롭게 인식하는 힘을 길러주는 좋은 ‘교육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기록이 남아 있는 독립운동가 수형자 5천여 명의 사진과 기록을 벽에 정리해 붙인 것도 서대문형무소를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들의 고난에 찬 저항의 장소로 학습하는 극적인 효과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전시실 안내판에 붙은 ‘일제강점기’와 같은 용어는 좀 더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

 

1908년~1945년을 가리켜 ‘일제강점기’로, 그리고 1945년~1987년을 두고 ‘광복이후’라고 명명하고 있는 데서 잘 드러나지만, 이러한 용어 선택은 모순된다. ‘일제강점기’와 ‘광복이후’는 전혀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서대문형무소를 일제의 억압과 그들이 한껏 조장해낸 공포에 맞선 역사의 현장으로 기억하고자 한다면, 역사학계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 이름도 사태의 성격에 걸맞은 ‘대일항쟁기’로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관으로 만들어진 과거의 형무소가 독립운동의 집단적 기억 장치로 활용되고 있는 이상, 민족 전체가, 이 나라 씨알 전체가 수동적 존재로 그려진 ‘강점기’라는 용어보다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치열하게 싸운 역사의 과정에 합당한 ‘對日抗爭期’라는 능동적 용어가 적절하지 않을까.

 

담장 밖 매점 근처에는 근처 노인들이 여러 명 모여 칠엽수와 등나무 아래 한가로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일터로 가지 못한 중년의 사내들도 몇몇 공원 벤치에 앉아 무료한 시간과 대면하고 있었다. 비가 그쳤다가 다시 내릴 때, 그 사이에 매미들이 연신 울어댔다. 잠자리들도 푸른 잔디로 ‘평화롭게’ 덮인 상처투성이 역사의 시간 위를 낮게 날고 있었다. 너무나도 일상적인 모습이 서대문형무소 안쪽, 외부와 차단됐다 시민들 품으로 돌아온 ‘식민 권력과 독재정권에 항거해 자유와 평화를 위해 수많은 희생이 있었던 역사의 현장’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무악재 가까운 현저동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김영걸 노인(78세)은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왜정 말에 소학교를 다니다가 을유해방을 맞았어. 서대문 까막소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저 벽돌담장을 봐. 글쎄 그게 얼마나 억세 보여? 그런데 그게 무너졌다니, 또 놀랄 수밖에. 자유당때나 박정희 대통령때도 저 자리에 변함없이 무서운 곳으로 남아 있던 곳인데, 이렇게 편하게 관람할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으니…” 노인은 말끝을 흐렸다. 그의 말대로 부녀 사이로 보이는 여성들, 젊은 학생들이 카메라를 들고 ‘역사관’이 된 서대문형무소 옥사를 연신 기웃거리고 있었다. 긴 형무소 담장 밖으로는 개를 끌고 운동 나온 중년 아주머니도 더러 눈에 띄었다. 또 어디선가 단체 견학을 온 목소리 높은 아이들의 행렬이 매표소 앞에 이어졌다. 아이들의 눈은 한껏 커져 있었다.

이들이 참담한 과거와 어떻게 만날지 궁금했다. “너무 놀랐어요. 감옥이 이렇게 무섭고, 고문 장면을 인형으로 만들어서 전시한 모습을 보니 으스스하고 떨려요. 유관순 누나가 갇혔던 지하 감방도 봤는데요, 저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마음이 무거워져요.” 점심시간이 지나 입장한 아이들은 청량음료나 작은 생수병을 들고 옥사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 발걸음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진다. 어느 순간 그들도 잠자리처럼, 과거의 흔적 위를 평화롭게 배회하는 것처럼 보였다. 2012년 8월 21일 오후 1시 40분. 기억의 집이 된 서대문형무소, 비 내리는 날의 어떤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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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웅 2013-09-02 21:43:41
유관순 고문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