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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혁명의 거점지에 자리한 조선독립운동의 심장
동아시아 혁명의 거점지에 자리한 조선독립운동의 심장
  • 교수신문
  • 승인 2012.11.26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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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13> - 상하이임시정부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목록
장충단공원, 명동·충무로 일대, 남산, 서울시의회 건물, 경복궁(광화문)일대, 덕수궁(정동),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군산항, 부산근대역사관, 광주일고,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 서울역, 경무대·청와대,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이화장 , 서울대(동숭동·관악), 부산 항구, 목포항, 소록도 , 인천항, 제주도, 판문점·휴전선, 부산 국제시장, 거창, 지리산, 용산, 매향리(경기도), 여의도광장(공원), 마산(현 창원) 바다, 4·19국립묘지·기념관, 명동성당, 광주 금남로·전남도청, 울산 공단,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청계천·평화시장, 구로공단 

▲ 파란많은 영욕의 세월을 지나온 상하이 임시정부 건물. 이역땅에 정부를 세운 선인들의 노력이 박제가 되고 있는 느낌을 준다.

 

 


한국의 유명한 언론인이면서 역사학자였던 文一平은 1912년 상하이 땅을 처음 밟으면서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 상하이부두에 내려 본즉 장려하고도 整齊하게 만들어진 시가의 규모가 듣던 바와 같이 과연 동양의 런던임을 수긍케 하는 바였다.” 이처럼 20세기 초 동아시아인에게 상하이의 화려한 시가는, 런던이 상징하는 서구적 근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곳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신천지’였다. 실제로 1920년대 黃浦항 外灘의 사진을 보면, 마천루처럼 솟아있는 빌딩과 잘 정비된 도로망이 오늘날과 비교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국제도시 상하이를 탄생시킨 계기는 개항이었다. 이곳은 長江을 포괄하는 장강 경제권과 寧波, 福州를 거쳐 廣州로 이어지는 동부 연해지역 경제권이 교차하는 지역에 위치했다. 南京조약으로 개항되면서 장강 유역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상하이는 국제적 무역 도시로 성장해갔다.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도시
상하이 발전의 또 다른 배경은 바로 租界의 존재이다. 조계 설치의 근거는 개항 다음 해인 1843년에 맺은 虎門조약이다. 황푸 강변에 1845년 영국조계가 처음 만들어지고, 이후 미국조계, 프랑스조계가 설치됐으나, 1863년 영국조계와 미국조계가 병합해 공공조계가 형성됐다. 이후 조계의 면적이 확대되면서, 상하이에는 중국 최초의, 그리고 중국에서 가장 넓은 면적의 조계가 만들어졌다. 상하이조계당국은 행정권, 사법권, 경찰권, 조세징수권을 가진 사실상 독립 정부로, 중국 내에 있지만 또 다른 국가 곧, 國中之國의 형상의 갖추게 됐다. 1943년 이전까지 상하이는 공공조계, 프랑스조계 그리고 중국인 거주지인 華界로 3分됐다. 이런 이유로 어떠한 국가권력으로부터도 배타적으로 지배되지 않는 도시로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상하이는 중국의 근대를 선도해갔던 도시였다. 국제적 무역도시일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 서구적 가치의 전파 창구이자, 전통적 가치와 서구적 가치의 충돌과 혼합의 공간이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역설적으로 조계의 존재 때문에 혁명 운동의 거점이 될 수 있었다. 한국을 비롯해 동남아의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한국인에게 상하이가 항일 투쟁의 공간으로 인식됐던 계기는 신해혁명이 진행되던 무렵부터였다. 申圭植을 비롯한 한인 망명자들은 중국 혁명의 성공에서 한국 독립의 가능성을 찾으려고 했다. 이들은 쑨원(孫文), 황씽(黃興), 천치메이(陳其美), 쏭자오런(宋敎仁) 등 중국 혁명파 인사와 교류에도 적극적이었다. 중국 내 한인 단체 同濟社, 최초의 한중 연대조직 新亞同濟社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쑨원의 호법정부, 임시정부 ‘사실상’ 승인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4월 13일 상하이 프랑스조계 金神父路(현재 瑞金二路)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식 출범했다. 프랑스조계당국은 임시정부의 온건적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불간섭 정책을 표명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활동은 일본인의 삼엄한 감시 하에 진행됐고, 조계의 질서를 동요시킬 만한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 발생할 경우 프랑스조계당국은 일본 당국의 협조 요청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의 활동에서 중국의 협조는 필수적이었다. 1921년 10월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법무총장이었던 신규식은 임시정부 대표의 자격으로 광저우 護法政府로 쑨원을 방문했다. 신규식은 이 자리에서 양 정부 간 상호 승인 등 5개항의 요청서를 제출하고 독립운동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요청했다. 쑨원의 호법정부는 임시정부를 ‘사실상’ 승인하고, 이후 비상국회에서 한국독립승인안을 통과시켰다.

1931년 일본은 이른바 9·18 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1932년 1월 28일에는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민간인 거주지를 무차별 폭격하고 중국과 협상을 끌어냈다. 1932년 4월 29일 홍코우(虹口) 공원(현재 魯迅公園)에서 일본의 상하이 사변 전승 및 국왕생일 축하기념식이 열렸다. 이 때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 당원 윤봉길은 홍코우공원의 식장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감행했다. 이 사건은 일본의 중국 침략이 노골화되고 있던 시점에, 상하이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의 심장부에서 조선인 독립운동가가 주도한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서 임시정부는 장제스(蔣介石)을 비롯한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었으나, 일본의 강압과 조계당국 태도의 변화로 상하이를 떠나야했다.

 


杭州를 시작으로 8년 장정 뒤 임시정부는 1940년 重慶에 자리를 잡았다. 상하이임시정부 유적지는 黃浦區 馬當路에 위치하고 있는데,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했던 장소이다. 가까이에는 중국공산당 창당대회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다. 임시정부가 자리한 블록은 예전 건물 그대로이지만, 그 주변은 서울의 청담동에 비견되는, 신텐디(新天地)로 알려진 유명한 번화가이다. 신텐디는 1920~1930년대 상하이의 황금 시절로 회귀하기를 바라는 Old Shanghai의 대표적 상징이다. 상하이 조계는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이면서도, 중국의 근대화를 선도했다. 또한 역설적으로 조계의 존재 때문에 중국혁명 뿐 아니라 동아시아 혁명의 거점이 될 수 있었다. 제국주의의 타도를 위한 혁명 유적지와 제국주의 시기 번영했던 상하이를 갈망하면서 조성된 신텐디는 오늘날 같은 공간에 공존하고 있었다.

 

이은자 부산대HK교수·중국근대사
필자는 고려대에서 박사를 했다. 저서로 『의화단운동 전후의 산동』, 『개항기 재한 외국공관 연구』 등이 있다. 현재 근현대 한·중 외교, 재한 중국인노동자 등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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