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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국문학과 영어강의 의무화가 ‘글로벌’?
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국문학과 영어강의 의무화가 ‘글로벌’?
  • 함돈균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국문학
  • 승인 2012.06.11 11: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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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국문학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번역 없이 영어 발음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글로벌’이라는 단어가 확실한 일상어로 널리 유통되기 시작한 시점은, 세계 금융위기의 여파 속에서 한국경제가 더 이상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독립적인 단위일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점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것은 이 단어가 종전에 있던 ‘세계화’라는 말과는 전혀 다른 층위의 기의를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사실 ‘세계화’라는 단어(아이디어)는 그 연원이 매우 오래됐고 그 단어가 출현하던 당시의 이념은 오늘날 시장질서의 세계적 확장을 뜻하는 ‘글로벌’과는 전혀 다른 맥락이었다.

서구 역사에 한정되는 얘기지만, ‘세계화’에 상응할 만한 ‘세계성’의 이념이 출현하는 것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4세기 무렵 알렉산드로스의 영토 확장 작업을 보며 환멸을 느낀 키니코스학파의 디오게네스는 ‘당신은 어디서 왔는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나는 하나의 우주에 속한 시민(Kosmopolites)이다’라고 답했다. 헬레니즘 시대의 스토아학파는 인간은 자신의 출생 지역공동체에 속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하나의 동일한 인간적 주장과 포부에 속한 공동체’(동일한 인간성과 윤리의 공동체)라고 주장했다. 더 널리 알려진 사례로는 18세기 칸트의 세계시민사상이나, 19세기 초반에 괴테가 민족문학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주창한 세계문학(Welt-Literatur)의 경우도 있다.

역사적, 문화적 맥락도 다르지만, 대체로 이러한 ‘세계성’의 이념이 지향하는 것은 모종의 배타성과 협소함의 울타리를 벗어나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질서와 공통된 인류적 기율, 보편적 가치의 토대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보이지 않는 인간성의 연대를 확장하자는 방향이었다.

그런데 한국말로 쓰여진 문학텍스트를 주로 해 연구하고 글을 쓰며 사는 내게 특히 흥미로운 사례는 칸트와 괴테의 경우다. ‘세계성’과 ‘보편성’에 대한 가장 창조적이며 급진적인 아이디어들을 제안하면서도 정작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당대 정치세계의 중심어였으며, 유럽 지식인들의 ‘보편어’이자 ‘세계어’였던 라틴어를 통해 말하지(글쓰지) 않았다. 그들은 고대세계에서부터 그들이 생존하던 근대계몽기까지 2천여 년 이상 유럽 지식인들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사유언어였던 그리스-라틴어 체계로 말하지 않고, 그와 가장 거리가 멀었고 그래서 그 중심어를 통해 펼쳐지던 주요 사유들(담론)과 영향관계가 거의 없었던 독일어로 사유하고 글을 썼다.

그것은 정치·사회·문화적 담론의 역사에 있어 적어도 유럽어에 있어서는 당시까지 가장 알려지지 않았고 영향력이 적었으며 그러므로 ‘후진적인’ 소수어 중 하나로 그들이 사유하고 글을 썼음을 의미한다. ‘글로벌’이라는 단어 이전에 오늘날 우리에게 서구가 전해준 가장 독창적인 ‘세계화’에 대한 아이디어 중 하나는 지배언어의 가장 궁벽한 자리에서 출현한 것이다.

시사적 차원을 넘어 오늘날 한국사회의 일상어가 되다시피 한 단어가 ‘글로벌’이다. 이 단어와 이 단어가 담고 있는 21세기적 기의를 광범위하게 유포시키고 있는 집단 중 하나가 바로 대학이다. 소위 대학의 ‘글로벌화’라는 현상은 오늘날 한국의 거의 모든 대학들의 절체절명의 과제가 돼 있다.

이 ‘글로벌화’의 대표적인 제도적 사례가 개별 학과의 정체성과는 무관하게 무차별적으로 설치되고 강요되는 소위 영어 원어 강의다. 심지어는 요즘 상당수의 대학 전임교원 임용 평가에서 국문학(한국학) 교수에게도 원어 강의 능력을 평가하고 있으며, 국문과에 영어 원어 강의가 대학당국 차원에서 의무화되고 있다. 모국어로 사유하고, 말하고, 글을 써도 한없이 어렵고 부족한 판에 모국어로 된 텍스트를 영어로 강의하란다.

이러한 21세기 식 글로벌화는 ‘세계화’의 이념이 본래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출현했는지에 무지하며 아무런 관심이 없다. 가장 궁벽한 언어로 사유하고 말하고 글 썼던 칸트와 괴테가 어떻게 참다운 세계성, 보편성의 근거를 확립해 그들의 사유와 언어를 세계적인 것으로 키워나갔는지를 참조할 일이다.
 

함돈균 고려대 HK연구교수·문학비평
고려대에서 박사를 하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김달진문학상 젊은 평론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시는 아무 것도 모른다』,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가 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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