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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계 자극한 경성의 복합문화공간… 황국신민화 유도하기도
공연계 자극한 경성의 복합문화공간… 황국신민화 유도하기도
  • 김호연 광주여대 교수
  • 승인 2012.06.05 1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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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문화 공간으로서의 부민관

1930년대 중반 경성은 조금씩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인구가 40만에 육박한 것도 그렇거니와 이에 걸맞게 근대식 건물이 하나둘씩 들어선 것도 그러한 면모다. 특히 경성부청을 중심으로 태평로 일대와 남대문로에는 조선일보ㆍ동아일보ㆍ매일신보 사옥, 성공회 대성당, 미쓰코시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을 비롯한 많은 건물이 들어서면서 도시적 색채는 더욱 짙어졌다.

1950년대 부민관

府民館이 세워진 것도 이 즈음이다. 부민관은 말 그대로 경성 부민을 위한 복합적인 문화 공간으로 건설됐다. 경성부는 1933년 6월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공공사업 시설비로 기탁 받은 100만원중 절반으로 부민관을 건설해 1935년 12월 20일 개관하기에 이른다.

연극단체·악극단 공연 의욕 불러와

부민관의 등장으로 가장 활기를 띤 것은 공연단체일 것이다. 당시 공연하기에 알맞은 극장 중 동양극장은 전속극단이 있었기에 많은 공연단체를 수용할 수 없었고, 단성사, 제일극장, 우미관, 명치좌, 약초극장 등은 일본인 소유인데다 영화상연이 중심이었기에 대관이 힘들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부민관은 많은 연극단체와 악극단에 자극을 줬고, 공연 의욕을 불러일으키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유치진을 중심으로 활동한 ‘극예술연구회’도 소극장에서 벗어나 부민관으로 진출해 ‘관객 본위의 연극’으로 나아가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극예술연구회는 이전까지 외국 번역극과 백여 명의 관객 밖에수용 못하는 등 아마추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유치진은 “리얼리즘에 충실했던 작품은 빈 곳이 많고, 기름기가 없어 빡빡하기만 하다. 부민관 같은 대극장을 사용함으로써 민중예술로 연극이 나아가야 한다”며 대극장을 통한 새로운 연극 세계를 피력했다.

이를 통해 다양한 창작극을 중심으로 극예술연구회의 대부분 공연은 부민관을 통해 이뤄졌고 「춘향전」(1936.9.29~30)은 연일 1천800백여 석이 가득 찰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이러한 바탕은 극예술연구회 뿐만 아니라 다른 극단들에게도 큰 자극이 돼 새로운 창작 공연이 줄을 이었다. 악극 또한 부민관을 십분 활용했다. 악극은 연기, 노래와 무용 등 다양한 볼거리가 제공된 버라이어티한 음악극으로, 이를 통해 관객들은 시대고를 잊고 문화를 소비하는 공간으로 부민관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일제 강점 후기 부민관은 국책에 순응하는 공간으로 전락했다. 총독부는‘국민극 수준을 높이고 각 부분의 연극인들로 해금 예술가로서 각자의 역량을 기울여 전시하 반도의 문화전’을 이룬다는 취지로 국민연극경연대회를 부민관에서 개최했다. 세 번에 걸친 이 대회는 연극인의 중앙 통제와 더불어 연극을 통해 일제의 사상을 전파하게 됐고 부민관은 결국문화통제의 상징으로 비춰졌다.

문화통제의 상징이 된 극장

이와 함께 부민관에서는 일제강점 후기 내선일체와 전시체제에 순응하는 활동이 여러 각도에서 일어났다. 1945년 7월 부민관에서 친일단체 대의당이 개최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도 그 대표적인 예다.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인사에 의해 일제에 대한 충성과 전쟁의 적극적 참여를 획책한 이 행사는 조문기를 비롯한 애국청년들에 의해 투탄 의거로 나타나 일제강점기 대표적 독립운동의 한 부분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부민관은 몇 가지 공과를 우리에게 남겼다. 첫째, 공연계를 활성화시키는데 커다란 영향을 줬다. 근대연극이 단조로운 신파극에 머물거나 서양의 리얼리즘연극에 머물다가 부민관의 등장으로 창작극의 활성화를 가지고 오면서 공연의 다양화를 꾀할 수 있었다.

둘째, 1930년대 중반 연극계를 주도하던 동양극장과 동반자 혹은 대립관계에서 공연계를 자극한 점이다. 동양극장은 전속극단을 통해, 부민관은 전속극단이 없이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국 연극이 한 걸음 발전하는 바탕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민관은 공연예술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고 관립이었기에 태생부터 문제점이 있었다. 설립초기 관립극장이라는 점에서 자유롭게 개방됐지만 1930년대 말부터는 국책연극의 온상이 됐으며 총독부의 주도 아래 연극경연대회를 개최하는 등 황국신민화, 신체제에 알맞은 연극으로 관객을 이끌게 됐다. 이 공간을 통해 몇 달 간 연극경연대회가 치러지면서 많은 극단들이 공연 장소를 확보하지 못해 지방을 전전하는 폐해를 가지고 오기도 했다.

이후 부민관은 광복 이후 짧은 기간 국립극장으로 쓰이다가 서울 수복 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이후 국회가 여의도로 옮기면서 다시 시민회관 별관으로 쓰였다. 이후 세종문화회관 별관(1976년)으로, 현재는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된다. 근대 건축물 중 몇 안 되는 원형 그대로의 공간으로 남아있는 이 건물은 지금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김호연 광주여대 교수ㆍ한국연극학

김호연 광주여대 교수ㆍ한국연극학단국대에서 한국 근대 악극 연구로 박사를 했다. 저서로 『한국연극의 새로운 인식』, 『한국 근대 악극 연구』등과 논문으로 「일제강점 후기 연극 제도의 변화 양상과 그 의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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