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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평화의 제전 엑스포, 인류공생의 양식으로 거듭나
진보와 평화의 제전 엑스포, 인류공생의 양식으로 거듭나
  • 오룡 언론인
  • 승인 2012.06.0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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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람회를 보는 두가지 시선

2012 여수세계박람회가 한창이다. 관람객 유치는 목표치에 비해 저조하지만, 별 탈 없이 순조롭게 운영되면서 국내외 방문자들에게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조직위원회는 박람회 홍보에 ‘내 평생 단 한 번의 기회’라는 문구를 내세웠다. 이처럼 ‘통큰’ 슬로건이 나온 배경에는 160년간 이어온 세계박람회의 빛나는 전통이 있다.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장전경(1915년).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경복궁 3분의1이 헐렸다. 당시 전시관에는 미술관, 음악관, 연예관, 철도관 등이 개설됐다. (가장 아래)

엑스포는 파리에 본부를 둔 국제박람회기구(BureauInternational des Expositions, 약칭 BIE)가 관장하는, 국제적 규모와 체제를 갖춘 박람회를 일컫는다. 여수박람회까지 공인 엑스포는 67회 열렸다. 1928년 11월 BIE 설립 이전 열린 20회 박람회는 추인된 것이다. 박람회 명칭은 다양했다. 영어권에서는 ‘exposition’, ‘exhibition’이 혼용됐고, 19세기 후반 프랑스가 세계박람회를 주도할 때는 ‘exposition universelle’라는 프랑스어가 통용됐다. 20세기 들어 세계박람회의 주 무대가 된 미국에서는 ‘world’s fair’또는 그냥 ‘the fair’란 용어가 널리 쓰였다. 대중에게 통용됐을 뿐 아니라 박람회 공식명칭을 그렇게 썼다.  ‘exposition’의 앞부분을 떼어낸 ‘EXPO’는 1960년대 BIE 운영자들이 만들어낸 신조어다. 이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1967년 몬트리올 박람회였다.

엑스포는 인류가 쌓은 지식과 기술, 자본과 인력이 총동원된 최대·최상의 국제행사다. 현대문명을 구성한 수많은 신개발품들이 엑스포를 통해 세상의 빛을 봤다. 재봉틀, 타자기, 청소기 같은 생활용품부터 고무타이어, 탈곡기, 전화기, 엘리베이터, 이동보도, X-레이, 플라스틱, 텔레비전, 컴퓨터, 로켓 같은 발명품까지 엑스포를 통해 보급된 물품 목록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케첩, 아이스크림, 솜사탕 같은 가공식품과 에펠탑, 페리스 휠, 자유의 여신상 같은 기념물도 예외가아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같은 걸작 예술품의 전시무대였는가 하면 각종 국제기구가 결성되는 교류의 터전이 돼 왔다. 첨단 통신·교통수단이 나오기 한 세기전부터 지구촌을 연결하는 산업·문화의 통로이자 네트워크였다.

그런 엑스포가 ‘일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매혹적인 볼거리였음은 당연하다. 세계인들은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낸 온갖 물상에 환호하며 축제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박람회장은 과학기술과 산업의 진보를 이끈 영감의 원천이 됐다. 조셉 팩스턴, 귀스타브 에펠, 르코르뷔지에, 조지 페리스, 야마사키 미노루 같은 걸출한 건축가들이 박람회장 공간 조성에 창의력을 쏟아부었다. 토머스 에디슨, 알렉산더 벨, 마리 퀴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헨리 포드 같은 수많은 발명가와 과학자, 기업인들이 박람회에서 성취동기와 아이디어를 얻고 그 성과물을 전시했다.

엑스포의 기원은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851년 5월 1일 영국 런던 하이드파크에 세워진 수정궁(Crystal Palace)에서 막을 올린 박람회가 그 효시다. 런던박람회 개막식에는 65만 명의 기록적인 인파가 운집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PrinceAlbert)은 개막선언에서 “이번 박람회는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을 진보시키고 지구상 모든 나라의 평화와 유대를 강화하게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진보와 평화, 이 키워드는 이후 엑스포 역사를 관통하는 양대 정신적 지주로 남았다. 영국은 당시 제국주의 위세와 국운이 정점에 달한 시기였다. 런던박람회 개막은 대영제국의 영화가 인류의 제전이란 화려한 꽃으로 만개했음을 온 천하에 선포하는 동시에 문명사에서 국제 교역과 소통의 새로운 장을 연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엑스포는 오늘날 국제질서의 근간인 자유무역과 세계화의 시발점이다. 실제로 첫 세계박람회 개최에서 넘어야 했던 가장 큰 장벽이 ‘국제화’였다. 영국은 박람회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당대 최고였던 자신들의 산업기술이 외국으로 유출될 것이 두려워 ‘국제’ 박람회 개최를 꺼렸다. 영국이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박람회 창시의 공을 차지한 데는 국제정세에 밝았던 한 지식인의 숨은 활약이 있었다.

일찍이 자유무역 신봉자였던 영국공공기록물보관소 관리관 헨리 콜은 상품교역 제한을 철폐해야만 인류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산업기술 보호에 집착하는 소심증에서 벗어나 국제 박람회를 열자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자 앨버트 공을 찾아가 영국이 국제 박람회를 선점함으로써 세계 무역·경제의 주도권을 거머쥘 수 있음을 역설했다. 콜의 주장에 공감한 앨버트 공은 당시로서는 뛰어넘기 힘든 벽이던 국제 박람회 실현의 견인차 구실을 해냈다.

엑스포의 흐름은 산업 자본주의의 무게중심과 함께 움직였다. 20세기 들어 미국이 세계박람회를 주도했다. 국가주의를 기반으로 했던 유럽과 달리 미국 박람회는 상업주의와 이윤동기가 강력히 작용했다. 그만큼 대중성과 오락성이 두드러졌다. 세계박람회는 1, 2차 세계대전 이후 심각한 침체에 빠졌다. 박람회가 그토록 찬양했던 과학기술의 진보가 인류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결과를 낳았다는 참담한 자기모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특히 매스미디어의 비약적 발전과 함께 엑스포는 자신이 세상에 내놓은 대체재와 경쟁하는 상황을 맞았다. 텔레비전·컴퓨터 같은 매체와 모터쇼 같은 전문 박람회, 놀이공원 등이 그것이다. 엑스포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공룡처럼 도태될지모른다는 우려마저 제기됐다.

그러나 엑스포는 1970년 오사카박람회를 기점으로 개최지가 다양해지면서 새로운 영역을 확보해나갔다. 문화교류 마당이자 개최국의 인지도,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이벤트로 성격이 확장됐다. 21세기 들어서는 환경문제 등 인류 공통과제를 논의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기능이 강조되고 있다. 문화적 다양성의 자양분을 흡수한 현대 엑스포는 이제 서방 선진국의 전유물이 아닌 인류 공생의 문명양식으로 거듭나고 있다.

오 룡 언론인
필자는 서강대에서 박사를 했다. 현재 제주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겨레신문 기자, 연합뉴스 밴쿠버 통신원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상상력의 전시장 엑스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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