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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시카코박람회 첫 참여… ‘엑스포’ 이후 열기 공유가 과제
1893년 시카코박람회 첫 참여… ‘엑스포’ 이후 열기 공유가 과제
  • 김희연 기자
  • 승인 2012.06.04 17: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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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박람회에서 여수세계박람회까지

지난달 12일 개막한 여수세계박람회가 한창이다.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은 ‘박람회’라는 양식은 19세기 중반 탄생해 초기 제국주의의 전시장 역할을 톡톡히 해 왔던 역사가 있다. 21세기, 박람회는 어떻게 진화해 왔을까. <교수신문>은 여수세계박람회 개최를 계기로 박람회의 기원과 변화를 살피는 동시에, 박람회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을 소개한다.

여수박람회장 앞 바다의 구조물 빅오에서는 매일 수만명이 동시에 관람할 수 있는 초대형 야간쇼가 펼쳐진다. 조명, 해상분수, 레이저, 불꽃 등의 효과가 동원돼 화려함을 극대화한다. 오른쪽은 지난 1일 ‘기니 국가의 날’에 열린 문화공연의 한 장면.

1993년 한국. 서울올림픽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세계적 이벤트가 막을 올렸다. 대전엑스포다. 주제는 ‘새로운 도약의 길’, 부제는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의 조화’와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이었다. 개발도상국으로서는 처음이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국제박람회기구의 공인을 얻어 개최한 세계박람회였다. 관람 가능한 국내인구의 3분의1이 다녀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은 선진국의 문턱에서 자못 축제 분위기를 만끽했다. 그로부터 19년, 여수세계박람회는 ‘살아있는 바다, 숨쉬는 연안’이라는 주제로 이제 20일 째를 보내고 있다.

박람회들의 홍수

박람회라는 말은 현재 다양하게 사용된다. 채용박람회, 산업박람회는 말할 것도 없고 결혼박람회, 꽃박람회도 있다. 그러나 1928년 파리 협약을 통해 국제박람회기구 BIE가 조직된 후 여수세계박람회처럼 ‘세계박람회’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은 보통 BIE의 심사와 승인을 받은 박람회뿐이다. BIE에서 인정하는 세계박람회는 두 가지로 나뉜다. 등록박람회 (Registered Expositions)와 인 정 박 람 회(Recognized Expositions)다.

등록박람회는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다루는 광범위한 주제로 5년마다 열리며 인정박람회는 한정된 주제로 등록박람회 사이에 한 번 소규모로 열린다. 한국에서 열린 대전엑스포와 여수세계박람회는 모두 인정박람회다. 등록박람회는 참가국들이 각자 돈을 들여 전시관을 건설하는 반면, 인정박람회는 주최 측에서 비용을 부담한다.

여수는 지난 2002년 2010년 등록박람회 유치를 목표로 했으나 탈락했다. 결국 ‘보다 좋은 도시, 보다 나은 생활’이라는 주제로 2010년 등록박람회는 중국 상하이에서 열렸다. 다음 등록박람회는 2015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다. 2020년 개최를 두고는 타이, 터키, 아랍에미리트, 러시아, 브라질이 경쟁 중이며 다음 해 결정이 난다.

한국이 처음으로 세계박람회에 발을 들인 것은 조선 말이다. 1893년 미국 시카고 박람회에 참여한 조선은 8칸 기와집을 짓고 나전칠기, 가구 등의 수공예품과 국악사 10명을 파견해 국악을 연주하고 조선을 소개했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는 민영찬을 특파대사로 보내 대한제국관을 설치하고 역시 비단, 도자기, 의복 등의 수공예품을 전시했다. 일본과 러시아 등 열강의 압력이 심해지는 가운데 조선 나름대로 국제 사회의 주체로 나서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해석된다.

당시의 박람회는 제국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전시장이었다. 그곳에는 눈부시게 발전하는 과학기술, 건축뿐만 아니라 제국의 폭력성도 함께 전시됐다.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중심부에서 열린 초기 세계박람회에서는 ‘인간 동물’의 모습으로 아프리카 원주민이 전시되곤 했다. 그것은 일본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1907년 메이지 천황 제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도쿄권업박람회가 개최됐다. 역시 팽창하는 일본의 힘을 대중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다양한 물품이 전시됐다. 그중에는 타이완 고산족과 더불어 조선인 남녀 2명도 있었다. 박람회는 우월한 ‘우리’와 미개한 ‘타자’를 대별해 인식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1910년 조선을 강압적으로 식민화한 일제는 1929년 조선 통치 20주년을 기념해 경복궁에서 조선박람회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한반도 각 도의 특설관들이 세워졌고, 內地館(일본관), 도쿄관, 교토관 등의 일본 지방관과 홋카이도관, 대만관, 만주몽고관, 사할린관 등 식민지 특설관이 세워졌다. 당시 일본의 세력범위를 선전하고 과시한 것이다.

한국, 전시되는 대상에서 전시하는 대상으로

이후 광복, 6ㆍ25전쟁을 거친 한국은 처음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로 1962년 미국 시애틀엑스포에 출연한 후로부터 세계박람회에 빠짐없이 참석해오다 결국 대전엑스포를 유치하는 데 이르렀다. 1993년의 호들갑은 전시되는 대상에서 전시하는 대상으로, 전시를 주최하는 ‘제국의 광휘’를 우리 스스로가 향유할 수 있다는 감격이기도 했을 것이다. 전후 복구를 끝마친 일본이 1964년 도쿄올림픽과 1970년 오사카세계박람회를 거치며 세계 선진국으로 진입 신고한 것을 목격한 한국이기에 더욱 그랬다.

대전엑스포는 성황리에 개최됐다. 한국을 포함해108개국과 33개 국제기구, 2백개 국내 기업이 참여했다. 3개월간 투입한 인력만 2만5천여명이고 정부와 민간을 합쳐 총 1조8천여억원의 재원을 들였다. 관람객은 1천450만명으로 추산된다. 세계적 종합엑스포로서 손색없는 규모였다.

그러나 대전엑스포의 열기는 1998년 외환위기로 이어지지 못하고 한풀 꺾였다. 그것은 엑스포 공간에서부터 극명하게 나타났다. 엑스포 폐회 후 상설전시관들은 엑스포 과학공원으로 이름을 바꿔 활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몇 백억씩 들여 지은 기업전시관은 외환위기로 기업 경영이 어려워지며 운영에 차질을 빚었고, 다른 상설전시관들도 관람객의 발길이 잦아들고 수입이 줄어들면서 거의 갱신되지 못해 ‘구닥다리’라는 말을 듣게 됐다. 한 기업이 매입한 엑스포 공원 경영권도 경영난으로 국가에 반납됐다.

2012년. 한국은 여수세계박람회로 세계박람회를 벌써 두 번이나 치른 국가가 됐다. 여수세계박람회는 5월 12일부터 8월 12일까지 93일간 개최되며 104개국과 10개 국제기구가 참가한다. 분위기는 아직까지는 한산하다. 일평균 15만명의 관람객을 받았던 대전엑스포와 달리 일 관람객 10만명을 넘은 날은 27일 단 하루뿐이다. 대전엑스포 때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국내 이곳저곳에 대형 전시장이 세워지고, 박람회가 쏟아져 나오는 지금, 세계박람회가 가진 ‘제국의 광휘’도 이제 빛이 바래는 것일까.

김희연 기자 gomi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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