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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와 진보 그리고 원효
보수와 진보 그리고 원효
  • 박태원 울산대 교수(철학과)
  • 승인 2012.05.29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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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현란한 구호들을 새긴 깃발들이 힘차게 나부낀다. ‘진리’, ‘선’, ‘정의’, ‘자유’, ‘평등’, ‘평화’, ‘행복’의 구호가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다. 그 숭고한 구호를 담아 치켜든 깃발들을 따르는 군중들은 서로 싸운다. 심지어 같은 깃발들 아래서도 피 흘리며 서로 다툰다. 제아무리 고귀한 구호일지라도, 그것을 새기고 따르는 이들의 열정에는 쉽사리 탐욕이 스미고, 적개심의 분노가 도사리며, 위장된 독선과 독단이 배어있다. 그 선동의 깃발 행진은 지금도 화려한 자기모순의 장관을 연출한다.

보수의 생명력은‘도덕성’에 있다. 도덕성이야말로 전통적 질서와 가치를 존중하여 보존하려는 보수의 생명력이다. 전통적 가치와 질서가 확보한 도덕의 지위를 굳건히 보존하고 실천해 가는 것이 보수의 정통성이다. 충분히 검증된 전통의 합리성을 신뢰하여, 그 합리성에 도덕적 권위까지 부여하며 실천을 통해 간수해 가려는 것이 보수의 건강성이다.

전통 속에서 합리적 행위의 모델을 발굴하여 도덕적 권위를 부여한 후, 도덕 능력의 축적과 치열한 실천을 통해 자기 선택의 정당성을 증명하려고 했던 유교 보수주의는, 보수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웅변한다.

한국의 정치 보수는 기이할 정도로 도덕성과의 의도적 불화를 보여준다. 한국의 보수는 합리적 전통을 발굴하고 그것을 도덕적 권위로 가꾸어가려는 데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직 기득권 전통의 배타적 사수만이 그들의 관심사인 듯하다.

진보의 정체성은 ‘변화’에 대한 적극성에 있다. 전통의 모든 불합리한 질서와 가치들로부터의 용맹스러운 거리두기, 보다 합리적이고 진리다운 새 질서와 가치를 향한 과감한 행보야말로 진보의 생명력이고 활력이다. 이미 도덕적 권위를 차지한 전통 질서와 체제에 내재한 부당함과 오염을 고발하고 휘저어, 정의롭지도 진리답지도 않은 기득권의 울타리를 열어 제치는 것이 진보의 역할이다.

이 ‘변화와 개방’의 생명력을 확보하기 위해 진보는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익숙함과의 결별’을 실행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기 내부의 불합리한 전통과 관행, 타성화된 관점과 욕구들을 정직하게 성찰하고 용기 있게 떨쳐내야 한다.

비록 무모해 보일지라도, 익숙함과 가차없이 헤어져 낯선 자리로 옮아가는 자유로운 영혼이야말로 진보의 자부심이다. 그런 점에서 진보 정신은 무집착을 진리 구현의 생명으로 삼는 구도자의 영혼과도 꽤나 닮아있다.

자신에 대해 보수적인 진보는 이미 죽은 진보다. 진보로 위장한 타락한 보수가 기만과 위선으로 구차한 명운 유지를 위해 발버둥 칠뿐이다. 한국의 자칭 진보가 과연 얼마나 ‘진보적 영혼’을 지녔는지 심각한 의문을 품게 하는 일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불교철학이 전공이고 노자와 장자도 강의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자연스럽게 진보 정신을 주목하게 된다. 無我나 無爲의 통찰은, 널리 통용되는 전통의 무게와 깊이를 그 전제에서부터 흔들어버리는 해체의 폭풍이기 때문이다.

이미 확보한 지위와 이익을 지속시키고 강화하려는 자들은, 기존의 가치와 질서, 체제를 불변의 본질이나 실체로 간주하게 하는 온갖 이론을 고안해 널리 퍼뜨린다. 불교의 연기적 무실체론, 노장의 무위적 비본질론은, 간교하게 구성된 허구와 기만의 인간관과 가치관, 세계관과 존재론의 환각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불교와 노장사상은 깊은 수준의 온갖 무지와 허위를 존재의 수준에서 들추어 해체시키는 진보 정신의 선구요 모범이다.

 

그 진보적 통찰을 계승한 원효(617~686)의 생애는 가히 ‘위대한 진보의 행각’이라 할만하다. 지칠 줄 모르는 보수 환각과의 대결, 전투적일 정도의 자기 변화와 개방은, 감동을 넘어 전율마저 느끼게 한다. 그는 자신의 이 진보 행각이 ‘본질이나 실체라는 환각을 설정하지 않는 참선(無生禪)’, ‘기존의 환각들에 지배받지 않을 수 있는 無住禪’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한다.

 

붓다, 노자, 장자, 원효와 같은 진보 영성의 통찰은 현실을 장악한 권력과 전통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억압되고 왜곡돼 왔다. 일그러져왔던 그 근원적 진보정신이 어떻게 복원되고 구현돼갈지 흥미롭지 않은가.

 

박태원 울산대 교수(철학과)
고려대에서 박사를 했다. 원효학술상을 수상했고, 「간화선 화두간병론과 화두 의심의 의미」, 「원효의 선사상」등의 논문과『원효사상연구』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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