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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은퇴’라는 그 말
맙소사, ‘은퇴’라는 그 말
  •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민속학
  • 승인 2012.03.0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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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
무슨 복을  타고 났던지, 나이 일흔을 셋 넘기도록 대학에서 전임으로 교단에 설 수 있었다. 이른바, 정년을 팔년이나 넘긴 것이니,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스럽다.

한데 한자로 停年이라고 쓰는 그 정년이란 뭘까. 停은 옥편에서 ‘머무를 정’이라고 읽고 있다. 길을 가다가 정지하거나 일을 하다가 중지하거나 하면, 그게 곧 停이니까, ‘멈출 정’이라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니까, 정년은 문자 그대로는 ‘멈추는 나이’ 또는 ‘그만두는 나이’다. 직업이나 직무 따위, 온 평생을 두고 몸 바쳐온 일을 더는 하지 않게 되는 나이, 그게 곧 정년이다. 직종 따라서 햇수가 들쑥날쑥 달라지기는 하지만, 어떻든 노년기의 어느 단계에서 정년은 하기 마련이다.

정년을 맞으면 으레 은퇴한다고들 한다. 정년은 곧 은퇴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데 은퇴는 한자로 隱退라고 쓰는데, 문자 그대로의 뜻은 아주 못마땅하다. 隱은 ‘숨을 은’이라고 읽는데, 은신이라면 몸을 숨기거나 감추는 것이고 은둔이라면 피해서 도망간다는 뜻이다. 退는 ‘물러날 퇴’ 또는 ‘빛이 바랠 퇴’라고 읽게 돼 있다.

하니까, 은퇴는 현실이나 사회에서 몸을 숨겨서는, 굴속에나 묵히듯이 외따로 물러나 있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나 개인으로서는 이게 영 마땅치 않다. 나이 든 탓에 종사하던 직업을 그만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니까 ‘정년’은 도리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도 영 마음 내키지 않는데, 엎친 데 덮친 꼴로 ‘은퇴’는 원수를 대하는 것 같아진다. 원수도 예사 원수가 아닌, 철천지원수라서, 은퇴라는 그 말이 아주 퇴거해 줬으면 좋겠다.

나는 한반도의 남쪽 끝, 바닷가 마을에 머물고 있는 지가 사뭇 오래고 또 오래다. 소위 정년을 여섯 해나 남긴 그 해에 서둘러 이사 와서는 기꺼이 둥지 틀고는 바지런히 살고 있다. 속된 생각으로는 그야말로 정년하고는 은퇴한 셈이다. 뒤로는 산들이 에워싸고 앞으로는 바다 내다보는 작은 마을이다 보니, 속된 생각으로는 문자 그대로 은퇴한 처지라고 할 것도 같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은퇴라는 문자 그대로, 세상 피해서 몸 숨기고는 물러 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동북으로 솟은 그만그만한 산들은 여간 아늑한 게 아니다. 우리 집을 다소곳하게 품어주고 있다. 마을 앞, 지척에 펼쳐진 바다는 ‘자란만’이라고 한다. 자주 빛 난초가 꽃핀 듯 하는 예쁜 섬이다 . 그 둘레에 그보다 작은 섬들이 떠 있는 그 바다는 또 다른 나의 뜰이다.  

앞뒤 사방이  쾌적하기 이를 데 없다. 자주 자주, 산으로 올라서는 소나무 숲속에서 고라니나 오소리를 저만큼 길동무 삼는 걸음이 사뭇 날렵하다. 바닷길은 걸었다 하면 으레 근 한 시간이다. 파도의 찰랑댐에 보조를 맞추면서 나아가는 산책은 순풍을 맞는 돛대의 율동을 닮곤 한다. 한겨울이면 오리 떼가 가르며 가는 물살을 닮는다.

그런 산책으로 싱그럽게 기가 살아나면 , 읽기, 쓰기 어느 일에나 쏟아 붓는 열정이 무섭도록  달아오른다. 컴퓨터 자판기 두들기는 소리는 알레그로 콘 브리오가 된다. 

이렇게 매일을 살기는 숨어서 물러서는 은퇴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정년하기 전이 오히려  무되게 느껴지도록 지금 당장 나의 일상은 숨 가쁘고도 가파르다. 그것은 은퇴 아닌 전진이다. 매서운 돌격이다.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ㆍ민속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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