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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위기 탈출법
인문학의 위기 탈출법
  • 설한 경남대 교수
  • 승인 2011.12.07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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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_ 설한 경남대 교수(정치철학)

설한 경남대 정치철학
권위주의 정권시절 당시 현실에서 인문학적 담론들이 드러내었던 무력성에 실망한 나머지 전공을 철학에서 정치학으로 바꿨다. 정치학이 보다 현실적이고 포괄적 학문으로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회과학에서 인문학적 토대의 중요성을 이내 다시 깨닫고 이후 정치·사회철학과 사상분야에 천착해 왔다. 하지만 최근 우리의 대학과 사회 모습을 보면 인문사회과학을 아우르는 전공자로서 심한 자괴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흔히 지적되듯 IMF체제 이후 극대화된 신자유주의적 시장논리는 대학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인문사회과학의 철학, 이론, 사상분야는 철저히 소외돼 갔다. 교수들은 업적지상주의의 흐름 속으로 내몰렸고, 학생들 역시 돈이 되는 전공과 과목에 몰리면서 인문학을 포함한 순수학문 영역을 외면해 왔다.

뒤늦게 ‘인문학의 위기’를 거론하며 ‘인문주간’을 선포하는 등 인문학과 대중과의 소통 확대, 인문학의 사회적 역할 강화라는 명분하에 각종 사업을 추진 중이다. 그런데 이런 사업들이 대부분 직업으로서 ‘인문학자의 위기’를 반영할 뿐 우리의 삶을 가치있게 만들어주는 것과는 무관하게 보이는 건 무슨 이유일까. 인문학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자존감을 가지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득케 하는 것이 돼야 하지 않는가.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 되돌아보면 변함없이 우울한 한국사회의 자화상이 펼쳐져 있다. 장애인학교에서 자행된 성폭력 사건은 우리 사회를 거짓과 폭력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일등을 강요받은 고 3 학생이 어머니를 살해하고 8개월간 방치했으며, 욕설을 하자 홧김에 남편을 살해한 아내도 있었다. 장기 불황 속에 민심은 흉흉한데 각종 부정부패는 끊이지 않고 정치권은 모든 이슈마다 편을 가르고 정략적 문제들에 여념이 없다. 이혼과 자살의 증가, 빈부의 양극화, 계층 간 위화감 등 사회구조적 모순과 상대적 박탈감의 만연 속에 모두가 마음 한켠에 분노와 적의를 키우고 있다. 위험한 사회, 증오의 문화를 공모하고 있는 것이다. 적개심에 불타는 위험한 시민들을, 쓸모없고 불행한 시민들을 양산해 내는 사회는 자멸적인 사회이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자성은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각종 병폐의 원인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나 낙후된 정치·사회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지 정책을 이끌어온 나쁜 철학과 사상, 이론의 문제이다. 사실 정책의 잘못은 상당한 정도로 철학적인 잘못에 기인한다. 모든 정책은 정치인, 교육자, 시정계획자, 정책입안자들의 이상과 원칙 그리고 인간본성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반영한다.

따라서 정책은 권리와 책무, 좋은 삶과 정의로운 사회, 교육의 목적 등에 대한 그들의 신념에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믿음과 신념이 한 개인의 철학을 형성하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철학자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의 많은 철학적․이론적 잘못이 탁상공론주의자들에 의해 야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자유주의 사회의 건설을 자유와 평등, 행복의 첩경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2천400여년전 플라톤은 덕(virtue)이 가르쳐질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즉시 그렇다고 대답했다. 만약 그것이 도덕원리를 내면화시켜 습관의 강력한 힘이 도덕행위의 편이 되게끔 훈련시키는 문제라면 덕은 가르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대답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에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사회도덕이나 윤리를 배우는 것은 사실(fact)을 배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것이 도덕과 과학 사이의 중요한 차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코브라가 치명적이라는 것을 다른 이로부터 듣거나 책에서 읽는 즉시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적절히 대응을 한다. 길에서 코브라와 마주치면 공포를 느낄 것이고 손으로 집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이 나쁘다는 것을 믿는 사람으로부터 듣거나 책에서 읽는다고 해서 우리가 반드시 그 도덕적인 믿음을 가지고 거짓말을 당연히 피하지는 않는다.

知力이 코브라에 관해 배운 것은 이미 존재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연계돼 그에 대한 믿음과 적절한 행위를 낳는다. 하지만 거짓말이 그릇된 것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 것은 단순한 지적 작업이 아니라 감정과 정서 및 습관에 대한 작업을 요구한다. 잘 양육되고 사회화된 사람은 거짓말, 도둑질 등과 같은 행위에 대해 나쁜 감정과 심리적인 고통을 느껴 그러한 행동을 꺼릴 것이다.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은 이러한 사회화와 도덕교육의 실패에 기인한다. 그동안 인문학은 도덕을 상대화시킴(relativization)과 동시에 지식화시킴(intellectualization)으로써 우리 모두를 탁상공론적인 도덕주의자로 만드는 데 일조해 왔을 뿐이다. 그리해 옳고 그름의 진정한 도덕적 대화는 갈등해결에 관한 대화로 대체돼 왔으며 도덕․윤리적으로 중립적인 탁상공론주의자들의 국가가 됐다. 고전을 읽고 석학의 인문강좌를 듣는다고 인문학의 위기는 사라질 것인가. 인성교육, 교양교육, 인문교육의 필요성을 외쳐대지만 인문학이 도덕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생활이 되지 못하는 한 그저 공염불에 그칠 뿐이다. 이래저래 인문학자들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설한 경남대 · 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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