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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이 을씨년스러운 이유
이 가을이 을씨년스러운 이유
  • 박성래 한국외대 명예교수
  • 승인 2011.11.14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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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칼럼] 박성래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세계사에 드물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는 한국에서 나는 혜택 받고 살았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하지만 가을이 쓸쓸한 것은 그런 것 때문이기도 할 듯하다.”

박성래 한국외대 명예교수
정년 7년째의 가을은 유난히도 을씨년스럽다. 입동이 지나서인가. 낙엽은 지천으로 길거리에 쌓여 덮이는데…. 이 늦가을에 문득 나의 봄날이 생각난다. 그 봄날의 가장 처절했던 대목은 나의 미국 유학 시절이다. 나는 1967년 1월 미국 한복판에 있는 캔자스로 유학을 떠나 꼭 10년 1개월 하고도 하루 만에 돌아왔다. 캔자스에서만 10년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2년 반 만에 ‘세계의 휴양지’ 하와이로 옮겨 거기서 7년 반을 공부했다.

지금 같으면 아마 5년 정도면 박사학위를 마칠 텐데 나는 어떻게 두 배나 되는 시간을 ‘박사’ 하나 얻자고 고생을 했던가. 몇 가지 변명은 가능하다. 세 가지가 없었다(三無)기보다 부족(三不足)했다고 해 두자. 첫째 돈이 없었고, 둘째 영어가 시원치 못했으며, 셋째 학맥이 전무했다.

경제적 어려움에서 나를 도와준 사람은 당시 캔자스대 사학과의 그린 교수였다. 과학사 학자인 그는 등록할 장학금을 마련해 줘 내가 공부를 시작할 용기를 줬다. 캔자스에서는 도서관에서 일해 살림을 꾸려갔지만 하와이로 옮긴 다음에는 아내가 식당에서 일해 생계를 맡았다. 

영어가 시원치 못했던 데다가 숫기가 적은 나는 사람들과 사귀지도 않고 유학생활을 계속했다. 유럽과 동아시아의 역사를 시원치 못한 영어로 공부하려니 고생이 심했다. 나는 박사자격시험에서 최종 불합격 판정을 받아 공부할 자격을 거의 잃기도 했다. 혼자서 공부하는 고약한 버릇에다가 영어가 부족해 교수들과의 대화가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학과의 사소한 잘못을 트집 잡아 겨우 불합격 결정을 취소하게 만들어 학위를 받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학맥 부족에서 올 법한 고통은 뜻밖에도 간단히 넘어갔다. 원래 물리학과를 졸업, 신문기자로 일하다가 미국 유학을 간 나는 대학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몰랐다. 학위논문 다음을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1975년 초가을 어느 날, 나는 대학시절 한번 도강했던 철학교수를 대학 구내서점에서 만났다. 만났다기보다 낯익은 얼굴에 얼떨결에 인사를 했던 것이다. 김준섭(1913~1998) 교수가 나를 알아볼 이치가 없었지만, 그의 주선으로 나는 갑작스레 한국외국어대 교수가 됐다. 역사학이 아니라 교양과학 담당으로.

이렇게 얼룩진 三不足 유학은 내게 풍성한 여름을 선물했다. 내가 귀국했던 1977년 초 한국에는 과학사를 ‘전공’으로 내세울 교수가 거의 없었다. 그 후 35년, 이 땅에는 여러 대학에 과학사 전공 교수들이 자리 잡았고, 그 상당수는 분당의 내 집에서 함께 공부했던 젊은이들이다. 1984년 서울대에 과학사 협동과정이 생기고 내가 그 한국과학사를 담당하게 되면서 내 강의를 집에서 했기 때문이다. 

나의 여름은 뜨거웠다. 강의에 바쁜 나날이었고, 라디오와 TV, 신문과 잡지에도 기회 있는 대로 과학사를 말하러 다녔다. 가끔은 과학자로 오해하고 현대과학에 관한 부탁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나는 과학사가 아닌 일은 극구 사양했다. 그리고 정년퇴임과 함께 나는 학교 강의와 TV 출연을 정식으로 거절했다. 강의는 후배들 자리를 뺏는 듯해서였고, TV는 내 늙은 모습이 스스로도 싫어서였다. 공부는 몇 가지 계속하려 했으나 그것은 여의치 않다. 천하를 주유하며 내 가을을 만끽하겠다는 희망은 유지하고는 있지만….

몇 주 전 내가 부임할 당시 한국외국어대 학장(총장)이었던 박술음(1902~1983) 교수의 동상제막식에 갔다. 학교가 상전벽해란 말이 실감날 지경으로 변해 있었다. 그 때 내게 떠오른 다른 풍경은 반세기 전 유학 갔던 캔자스대였다. 정년과 함께 처음 찾아갔던 내 모교 캔자스대는 변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살던 집이 새 집으로 바뀌었고, 대학에도 건물이 여럿 늘어났지만…. 하지만 한국에서처럼 무서운 기세로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사에 드물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는 한국에서 나는 혜택 받고 살았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하지만 가을이 쓸쓸한 것은 그런 때문이기도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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