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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겠다고 다짐한 뒤 연구가 풀리기 시작했다
비우겠다고 다짐한 뒤 연구가 풀리기 시작했다
  • 남상훈 광주과학기술원 박사후연구원·재료공학
  • 승인 2011.10.24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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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학위과정을 되돌아보다

 

남상훈 광주과학기술원 BK21박사후연구원·재료공학
지난 시간을 되돌아봐도 이르지 않을 만큼 충분한 시간들을 연구실에서 보냈다. 그 사이 나는 화학공학 전공에서 재료공학으로 전공을 변경했고, 지도교수님과 연구테마도 바꾸게 됐다. 또, 연구 외적으로도 후배에서 선배로, 미혼에서 기혼으로 되는 등 수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 사이에 겪었던 격동적인 사건들을 정리하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쉽게 얻을 수 없는 경험이기도 하고,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또, 반성 없이 맞게 되는 미래는 불안하기만 해서 도무지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누군가 내게 시킨 일도 아닌데 나는 학위과정 중 밤을 새우는 일이 잦았다. 학위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름다운 열정이고, 육체적ㆍ정신적 피로함은 이겨내야만 하는 과제 정도로만 여겼다.

하지만 나의 연구는 이상하리만큼 정착하지 못해 교수님, 동료,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쳤다. 모든 것을 바쳤음에도 결과는 항상 부족하다고 느꼈다. 무언가 어긋나 있다는 것만 느낄 뿐 실체가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변함없는 최선으로 상황이 해결되기만을 바랬다.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잠과 가정생활을 더 많이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큰 개선사항 없이 주어진 시간은 점점 줄어들어 갔다.

같은 시기에 투고한 연구논문은 계속해서 거절돼 돌아왔다. 졸업시기가 미뤄지는 문제는 둘째로 치더라도 미래의 향방이 긍정보다는 부정으로 기울어져 가는 건 떨쳐낼 수 없는 큰 고민거리가 됐다. 결국에는 사고가 일어났다. 작성을 마무리했던 논문이 잘못된 분석으로 인해 전면적으로 수정돼야 했다. 교수님의 책망도 책망이지만 그 책망이 아프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연구에 대한 자신감도 사라지고 말았다. 박사학위를 취득하기로 했던 결심이 어리석었다고 자책했고 결국에는 그만 두겠다고 생각했다.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어느 한 부분을 개선시켜서 역전될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극단적인 선택을 미뤄둔 채 결과를 재검토하고 논문을 수정해 나갔다.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나는 잠을 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나기도 하고, 답답한 마음에 학교주변을 하염없이 걸었다.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은 하지 않는 어이없는 실수들을 하고, 주어진 자원을 비효율적으로 다루고, 그런 걸 열정으로 치부하는 내가 싫어지기만 했다. 그리고 지금 상태로는 어떤 것을 더 해본들 소용이 없음을 통감했다. 그저 답답하고 개선되지 않는 하루하루를 지낼 뿐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각들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것들을 모조리 시도해보면 어떨까. 몸이 피곤하면 쉬어줄 것,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을 것, 사실에 근거해서 판단할 것, 상대와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반응을 살필 것, 내 주장을 앞세우지 않을 것,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도록 훈련할 것….’ 하나같이 개별적으로 듣고 흘려보냈던 이야기들이지만 한 번에 모아서 생각해보니 모든 일들이 한가지로 귀결되는 듯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그 후 나는 운동을 시작하고, 수면시간이 일정하도록 했고, 흐트러진 건강을 다스리기 위해 병원을 다녔다. 연구를 할 때도 내 생각을 적용시키기 보다는 주어진 제시조건을 맞추고, 더 나은 과정이나 결과를 위해 동료들의 조언을 반영했다. 해야 할 일들은 조언을 구해야 했기 때문에 더 빠르게 진행했다. 이해하지 못한 일은 다시 물었다. 창피함보다는 일이 잘못되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내의 감정 상태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이견을 조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바뀌는 것들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그저 되돌아보지 못했던 긴 시간들을 반성하는 뜻으로 내 것이 될 때까지 변화된 생활을 반복했다. 그리고 일상은 늘 그래왔듯이 흘러가기만 했다. 어느 날부터는 졸업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투고했던 연구들이 논문으로 출판되고 특허화 됐다. 교수님과 진행했던 연구의 연속성과 다음 진로를 두고 함께 고민하게 됐다. 집을 감돌았던 무거운 분위기 대신 생활소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결국은 졸업 이후 해외연수를 준비하고 있다. 변화를 위한 시도들이 유효했던 것이다.

‘나’를 비우겠다고 다짐하고 나서야 연구가 풀리기 시작했다는 점은 다시 생각해도 신기할 따름이다. 그 다짐 후에 전체적인 삶의 균형을 유지하기 시작했고 편협하지 않는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정상적인 연구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균형점을 찾아내고 편협함을 벗어내는 일이 필요했던 것 같다. 연구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연구를 해나간다는 것이라는 교훈은 큰 깨달음이 됐다. 나의 경우에는 그랬다.

남상훈 광주과학기술원ㆍ재료공학
광주과학기술원(GIST)에서 박사를 하고, 지금은 BK21 박사 후 연구원으로 있다. 연구 분야는 1차원 나노구조 전극물질, 에너지 저장장치(리튬 2차 전지, 슈퍼 캐패시터)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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