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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세계를 바꾼다
책은 세계를 바꾼다
  • 이영석 서평위원(광주대)
  • 승인 2011.10.13 13: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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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이영석 광주대
출판도시 파주 헤이리에서 책의 축제가 열렸다. 책의 저자와 제작자와 독자가 함께 만나 어울리는 여러 행사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전 컬럼에서 필자가 썼던 헤이온와이 책마을의 리처드 부스도 축제에 참여했다. 그는 헌책 거래가 가난한 사람들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목적을 둔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의 기행은 알만한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만, 어쨌든 그는 거대자본과 매스미디어에 저항하는 급진적 지식인의 한 사람이다.

부스는 수백년간 축적된 인류의 지혜가 헌책에 담겨져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지식과 지혜가 오늘날의 문명을 만들었다. 책은 사람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때로는 사회를 바꾸고 역사 전개의 새로운 물꼬를 트기도 한다.

몇 달 전에 나는 한 영국 역사가의 책을 읽으면서 이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책의 주제는 유럽인들이 차를 애용하게 된 역사를 다뤘지만, 첫장에 왜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에 뒤이어 아시아 무역을 주도하게 됐는가를 탐색한다.

사실, 15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은 여러 면에서 유라시아대륙의 이슬람, 중국, 인도 같은 다른 문명권에 뒤쳐져 있었다.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 세계사를 성찰하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유럽이 근대문명을 주도한 계기는 내적 요인보다는 외부 요인, 특히 대양탐험과 그 이후 전개된 유럽세계의 확대에 있다. 유럽-아메리카-아시아를 연결한 새로운 무역로가 유럽의 근대화를 촉발한 것이다.

15세기 말 유럽의 대양탐험가들에게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자극을 주었다는 견해가 있다, 콜럼버스도 이 책을 여러 번 읽었다고 전해진다. 대양 탐험 이후 유럽 세계의 확대과정에서 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 영국이 차례로 주도권을 잡는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네덜란드다. 에스파냐의 봉토였던 이 작은 나라는 15세기 말 독립 이래 포르투칼과 에스파냐를 따돌리고 국제무역을 선도하는 해양국가로 발돋움했다.

그동안 나는 네덜란드가 해상지배권을 장악한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면서도 뚜렷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이 나라가 에스파냐의 봉토여서 대양탐험이나 해상활동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최근 나는 유럽 차의 역사에 관한 영국인 저자의 책을 읽다가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한 젊은이의 끈질긴 노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었다.

16세기 말 인도항로는 포르투갈 상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이들은 인도 고아에 거점도시를 마련하고 말라카 해협과 인도네시아 등 인도양 연안지역의 무역을 장악했다. 인도항로는 매우 위험했기 때문에 상세한 해도와 연안지역에 대한 정보가 중요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이 정보를 중요한 기밀로 유지함으로써 동방무역을 지배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의 독점구조가 깨진 것은 얀 판 린스호튼이라는 한 네덜란드 젊은이의 활약 때문이다. 그는 고아의 가톨릭 주교 밑에서 비서로 지냈다.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주교의 신임을 얻었고 그 덕택으로 비밀문서를 보관하는 문서고까지 몰래 출입할 수 있었다.

린스호튼은 모든 사람들이 잠든 한방 중에 그 문서고에 들어가 해도와 지도, 그리고 인도양 각 지역의 풍물에 관한 정보를 필사했다. 그의 작업은 3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 작업이 끝난 후 그는 고아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는 배에 몸을 실었다. 도중에 배가 난파당해, 예멘에서 노예로 일하기도 했다. 수년간의 고생 끝에 그는 고국에 돌아왔다. 1598년 마침내 그는 필사기록과 지도들을 모아 『인도항해기』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동방항해에 관심을 가진 네덜란드 사람들의 필독서가 됐다.

이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활용해 네덜란드 상인들은 포르투갈을 제치고 대양무역을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역사에 나오는 하멜도 바로 이 변화의 산물이다. 한 개인의 능동적 행위(agency)가 그 자신만이 아니라 한 사회와 나아가 국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 

역사의 본질은 변화다. 역사가는 변화의 원인들을 찾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젊은 시절에 나는 개인보다는 집단, 정치보다는 경제와 사회구조 속에서 변화의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근래에는 이런 시각에 상당한 회의를 느끼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개인의 능동적 행위가 구조보다 더 중요하며 새로운 변화를 낳기도 한다. 린스호튼이라는 한 젊은이의 활동, 구체적으로 그가 남긴 책 한권이 17세기 세계사의 방향을 바꾸는 데 일조한 셈이다.

이영석 서평위원/광주대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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