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성만 |
같은 유물론적 미학이면서 체르니예프스키의 생명의 미학과 아도르노의 죽음의 미학이 대립한다. 전자는 생명을 표현하고 촉진하는 것이 아름답다고 한 반면, 후자는 삶이 왜곡되어 있고 물질주의와 폭력이 현실을 지배하는 한, 아름다운 것은 오히려 죽은 것, 무력한 것이고, 현대예술에서 미의 기능은 그러한 왜곡을 은폐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과 고발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두 사람에서 현실과 삶의 개념이 대립적이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그 두 사상은 모순되지 않고 수렴할지도 모른다. 여하튼 아도르노의 경우 삶이 왜곡되어 있을 때는 삶의 부정, 즉 죽은 것만이 진실이다. 세상이 미쳐 있을 때는 건강하고 정상인 사람이 실은 비정상이고 미친 사람에게서 오히려 진실이 표현될 것이다. 좀 다른 맥락이지만 "죽기로 작정하면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말도 이와 유사한 사정을 표현해 준다.
하지만 죽은 것의 예찬은 자기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결국 죽음은 삶과 신명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와 삶 사이의 모순인가. 사랑 같은 것으로 둘 사이의 모순을 화해시킬 수는 없는가. 그렇지만 사랑도 모순적이다. 상대를 붙잡고 움켜쥐려는 욕망의 사랑, 에로스적 사랑이 있는가 하면, 상대를 사랑하기에 오히려 그 상대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아가페적 사랑도 있다. 그렇다면 사랑 개념 자체 속에 모순이 있는 것일까.
나는 대학에 다닐 때 이런 역설과 양면성을 삶의 모든 현상에서 볼 수 있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찾는 진리는 결코 그 양극성의 중간쯤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이가 들고 세상을 관조할 때쯤 나 역시 그런 중용의 덕을 체득할지 모르겠지만 세계고에 빠져있던 청년 시절에는 성현들이 깨우친 진리라며 어른들이 즐겨 설교하는 그런 중용의 덕은 뭔가 타협주의 냄새가 나서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후 나는 여러 사상가들을 공부하면서 이런 모순을 극복했다기 보다 오히려 더 확인하게 되었다. 내가 배운 것은,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사유라는 점, 그리고 결코 논리의 '일관성'이 아니라 오히려 '과격성'과 '긴장'이 진정한 사유의 특성이라는 점, 사유는 인식활동인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 카테고리라는 점이다. 사실 사유는 사유하는 주체가 통제할 수 없는 과정이다. 사유가 긴장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긴장과 노고를 덜어줄 공식이 되는 순간 그 사유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게 된다. 현실과의 거리가 사라지고 그 현실을 충실하게 복제할 뿐인 사고는 더 이상 비판적이지 못하고 모든 사물을 계량화하는 도구적 이성에 함몰되어 버릴 것이다.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스스로 자기확신이 없는 사유만이 진정한 사유라고 했고 심지어 자신에 반하는 사유를 요구하기까지 했다. 사유의 이러한 니힐리즘과 비극이 바로 사유가 살아남는 길, 그로써 삶이 살아남는 길이 되는 셈이다. 이 무슨 역설인가! 그래서 아직도 풀리지 않는 내 고민은 이런 것이다. 비판과 신명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인가. 사람들은 월드컵도 즐기고 투표도 할 수는 없는가.
<이화여대·독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