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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온와이의 풍경
헤이온와이의 풍경
  • 이영석 광주대 서양사
  • 승인 2011.08.22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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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이영석 광주대 서양사

이영석 광주대 교수(서양사)
영국사를 공부하기 때문에 자료 모으러 가끔 영국을 방문한다. 그럴 때마다 이 나라 시골풍경에서 시간이 정지된 듯한 인상을 받는다. 몇 주 케임브리지에 머물면서 도서관 자료를 수집한 후에 모처럼 시간을 내어 헤이온와이를 찾았다. 마을 이름은 글자 그대로 ‘와이강변의 헤이’(Hay on the river Wye)라는 뜻이다.
두 번째 방문이라 그랬을까. 아니면 처음 찾았을 때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던 탓일까. 웨일스의 무어(황야)와 숲이 무성한 낮은 언덕과 작은 여울이 어우러진 그곳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었지만, 정작 그 책마을은 활기를 잃고 있었다.

우선 서점 숫자가 크게 줄었다. 이전에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헌책방들의 일련번호가 거의 50에 이르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일련번호는 30을 넘지 못한다. 그 대신에 책방이 있던 자리에 관광객을 겨냥한 기념품점이나 레스토랑 또는 술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리처드 부스가 처음 문을 열었던 서점(18번)은 주인이 바뀌었다. 부스는 마을 언덕에 자리한 큰 저택에 살면서 ‘성채서점’이라는 책방을 따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에 들렀지만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다만 서점 직원에게서 그가 9월에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일련번호를 따라 몇 군데 서점을 돌아보다가 눈에 띄는 책 두 권을 샀다. 하나는 1929년 아널드 토인비가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펴낸 『중국기행』(1930)이고, 다른 하나는 이치양이라는 한 중국인이 자신의 영국생활을 회고한 『런던의 조용한 여행자』(1938)다. 특히 토인비의 책 속표지의 저자 이름 바로 밑에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이 신기했다.

1962년 젊은 부스가 이곳에 처음 헌책방을 연 이래, 헤이온와이는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애호하는 유명한 마을이 되었다. 영국뿐 아니라 러시아나 폴란드 같은 다른 나라에서 수집된 고서들이 이곳에서 팔리기도 했다. 말하자면 세계 헌책방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을도 변했다. 헌책방에 진열된 책들 가운데 진기하거나 오래된 책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영국을 비롯해 유럽 전역의 고서들이 이제 거의 다 소진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계적인 명소가 된 후에, 마을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이 상업화 물결에 밀려났기 때문일까. 어쩌면 헤이온와이의 변모는 금세기 책들의 황혼을 여실히 보여주는 표지일지도 모른다.

책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것은 케임브리지 대학도서관을 출입하면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이전과 달리 도서관 서고 여기저기에 놓여 있던 독서용 책상들이 거의 사라졌다. 늘어나는 신간서적을 분류해 이들 책상에 진열한 탓이다. 신간서적은 분류번호를 알고 있어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공간이 부족해 건물 뒤쪽에 신관을 붙여 증축했지만, 그곳도 몇 년 후에는 책들로 가득 찰 것이다. 도서관측은 공간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수백만 권의 서적을 디지털화하는 장기 계획을 수립했다고 한다.

오래된 대학의 중앙도서관은 인류문명의 지식을 축적하고 전수하는 소중한 장소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여름철이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연구자들이 자료를 찾느라 분주하게 오간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나면 아마 이곳 도서관 모습도 완전히 바뀔 것이다. 그 무렵이면 이 거대하고 우중충한 건물이 오직 과거 한때의 영화를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변모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초등학교 교과서를 전자책으로 바꾸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아이패드 열풍이 불어온 지 2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제 디지털이 책을 몰아내고 있는 현실이다. 넓게 보면 디지털문명이 책의 문명을 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책에 익숙한 나의 세대는 이제 퇴장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바야흐로 책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는 것이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접경지역에 위치한 헤이온와이의 저녁 풍경은 숲과 여울과 낮은 언덕과 낡은 집들이 한데 어울려 색다른 정취를 풍겼다. 나는 그 이국적인 정취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오히려 유년 시절에 살았던 시골마을의 추억을 떠올렸다. 시간이 멈춘 듯한 헤이온와이는 지금도 헌책들의 보물창고다. 그러면서도 그 보물창고에서 책들의 황혼을 연상하는 내 모습이 자못 처량하기까지 했다.

이영석 광주대 ㆍ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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