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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대학의 변질과 인문학의 위기
[원로칼럼] 대학의 변질과 인문학의 위기
  • 박영식 전 교육부 장관·철학
  • 승인 2011.07.0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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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식 전 교육부 장관·철학
로마시대 케사르와 같은 시기의 정치사상가인 키케로는 자유학예가 인간에 관한 연구라는 의미에서 ‘Studia Humanitas’라고 명명했다. 여기에서 ‘인문학’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후 보에티우스에 의해 자유학예는 ‘일곱 자유학예(Seven Liberal Arts)’로 정리되는데, 일곱 자유학예는 문법, 수사학, 변증론의 3學과 산수, 기학, 음악, 천문학의 4科로 구성된다. 여기서의 3학은 ‘화법에 관한 학예’고, 4과는 ‘實在에 관한 학예’다. 이것이 르네상스를 거쳐 1800년대에 학문이 분화되는 과정에서 화법에 관한 학문인 3학이  ‘인문학’으로, 실재에 관한 학문인 4과는 ‘자연학’으로 불리면서 나뉘게 된다.

인문학은 중세 유럽 대학들에서 기초교양학문으로 자리 잡았다. 학생들은 의학을 전공하든, 법학이나 신학을 전공하든 기초교양학문인 인문학에서 일정 학점을 이수하게 돼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인문학은 인문학과 자연학으로 분화되고, 인문학도 독자적인 학문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경제학, 정치학, 문학, 역사, 철학 등이 모두 학문으로 정립한 것이다.

인문학이 학문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대학에서 인문학은 기초교양학문의 범위를 벗어나 독자적 학문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대학의 중심에 자리할 수 있게 됐다. 직업으로서의 의학, 법학, 신학 등은 주변으로 밀리게 됐다. 이때 비로소 대학이 학문의 본산이요, 진리의 전당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대학의 풍토는, 미국에서는 대학들이 응용학문들을 수용하기 위해 ‘College’에서‘University’로 그 이름을 바꾸는 1880년대까지 지속됐고, 한국에서는 1965년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특수대학원들이 나타날 때까지 지속됐다.

산업혁명은 학문과 대학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새로운 산업이 생겨나면서, 새로운 산업은 새로운 학문을 요청하게 되고, 새로운 학문은 새로운 산업을 낳게 되면서 학문과 산업이 연계돼 새로운 응용학문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 응용학문들이 대학의 전공학과로 들어서면서 대학은 크게 변질하게 된다. 인문·사회·자연의 기초학문 중심에서 응용학문 중심으로, ‘College’중심에서‘School’중심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응용학문들이 세부적인 응용학문들로 분화되면서 대학은 세부적 응용학문 전공자들을 배출하게 된다. 이와 같이 대학이‘세부적 응용학문 전공자’를 배출하게 됨으로써 대학은‘취업예비학원’으로 전락하게 됐다. 이제 대학은 건전한 양식과 긴 안목을 지닌‘지도적 인물’을 배양하는 기관도 아니고, 학문의 본산도 진리의 전당도 아닌 곳으로 변질됐다. 이러한 대학의 변질을 개탄하는 교육자도, 이를 고뇌하는 총장도 별로 찾아볼 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런데 요즘 회사 CEO나 사회 지도층은 대학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인문학을 되레 요청하고 있다. 지도적 인물들에게는 구성원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감동적 연설을 해야 하고, 그의 뜻이 담긴 글도 써야 하고, 교양 있고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등 창의성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들은 그 회답을 인문학에서 구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인문학이 ‘회답’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인문학이 상상력의 산물이요, 감동을 주는 지식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문학, 역사, 철학이 그러한 상상력과 감동을 주는 지식의 보고라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성에 기울어져 독단론에 빠진 대륙의 이성론과 경험에 치우쳐 회의론에 빠진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해 인식을 경험과 이성 위에 세운 칸트의 비판적 인식론, 진리에 붙어 있던 절대성, 영원성, 불변성이란 수식어를 떼어버리고 진리란 일을 해내고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이라면서 진리의 상대성과 도구성을 역설한 프래그머티즘, 두 차례 세계대전과 기계문명을 경험하면서 삶의 의미를 상실한 인간에게 자유로운 실존과 책임의 존재성을 일깨워준 실존주의…. 이러한 철학의 사조조차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것은 한 고비를 넘기면서 우리를 새로운 국면으로 인도할 때마다 지적 감동을 선사하는, 무한한 지식의 보고가 아닌가.


박영식 전 교육부 장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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