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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가 두렵다
생각하기가 두렵다
  • 김대행 서울대 명예교수
  • 승인 2011.06.07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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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김대행 서울대 명예교수(국문학)

김대행 서울대 명예교수(국문학)
친구는 다소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백수가 되니 스승의 날도 전 같지 않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가 쥐어박았다. “당연하지. 우리가 언제 ‘스승’이었어? 기껏 ‘교수’였지. ‘교수의 날’이라면 모를까 ‘스승의 날’인데 누가 우릴 기억하겠어?” 함께 웃고 말았다.

대학생이 자기 선생을 ‘교수님!’이라고 부른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대학생이었던 1960년대에는 ‘선생님!’이라 했던 기억이 분명하다. 그랬는데 내가 신참교수가 돼 대학엘 갔던 1970년대에 이미 학생이 나를 ‘교수님!’으로 불렀다.

학생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를 이해도 시키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5~6년 전부터는 ‘교수님!’이라고 부르는 학생들을 나 또한 보게 됐고, 일일이 고쳐주기 어려운 지경이어서 별수 없이 견디고 말았다. 물론 그렇게 부르는 학생이 제한적이기는 했다. 부전공 혹은 복수전공 과목으로 내 강의를 듣는 다른 학과 학생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 아니면 성적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이 그랬다. 허나 여기까지는 그래도 견딜 만했다.

실로 날벼락을 만난 건 근래의 일이다. 내 강의를 들은 학생이었고, 지금은 대학교수인 제자가 전화 저쪽에서 내게 “예, 교수님!”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늘이 깜깜하게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을까. 그 제자교수는 이내 잘못을 깨쳤는지 “학교에서 늘 그래 버릇해서……”라며 사과했다. 그러나 내가 잘못 살았는가, 아니면 세상이 망해 가는 건가 ? 어지러웠다.

‘교수님!’이나 ‘선생님!’이나 무어 크게 다르겠는가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수님!’이라는 호칭은 직업 혹은 직급의 이름이어서 ‘나와 다름’을 전제로 한 호칭이다. 마음속에 ‘당신은 나와 다른 사람이며, 그러니 우리는 거래 관계에 있을 따름’이라는 생각이 바탕을 이룰 때 상대방을 그렇게 부를 수 있게 된다. 아니 그렇게 부르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선생(先生)’은 말 그대로 ‘앞선 사람’이다. 그러니 ‘앞서 가는 당신을 따르겠다’는 생각의 표현이다. ‘당신과 내가 공동 운명임’ 혹은 ‘한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확인하게 됨은 그 때문이다. 퇴계의 銘旌에 ‘退溪李先生之柩’라고만 쓴 것을 보더라도 ‘선생’은 한없는 우러름을 담은 호칭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제자가 나를 ‘교수님!’이라고 부르는 한, 나는 결국 ‘선생’이 못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될 따름이다.

침소봉대 그만하라고 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학의 실상을 보자. 여행을 인솔하는 교수도 학생처럼 여행경비를 내라는 학생도 생겨나고, “교수님! 요즘은 전하고 달리 교수님들이 돈을 내시대요” 하며 웃어 주는 나이 든 식당주인도 본다. 대학원의 지도교수를 문서에 도장이나 찍어주는 사람으로 여기는 학생조차 있는가 하면, ‘당신처럼 하다간 다 망한다!’고 고함지르는 제자교수도 겪는다. 학계 또한 마찬가지. 새로운 학회를 만들면서 ‘몇 살 이상은 가입 제한’으로 딱지를 붙여 출범하는 학회도 기이하지 않다.

세상도 한가지다. 우리 사회에는 이른바 ‘원로’가 없다. 노인은 웃음의 소재로 전락한 지 오래다. 나이 든 사람이 혹 존경받는 것으로 보이는 일이 있다면 그건 자기 패거리라는 뜻일 따름이다. 예전에는 달랐다. 대학의 졸업식 때가 되면 온 사회가 대학 총장들의 말을 기다렸다. 때로는 추기경이며 종정스님 혹은 원로목사님의 말씀에서 깨닫고 옷깃을 여미기도 하였다. 이제 그처럼 ‘과거로 깨우치는 분’은 이미 없으며, 오로지 ‘많이 사신 분’만 존재할 따름이다.

신기조차 하다. 인간이면 누구든 과거의 눈으로만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새삼 입증할 필요조차 없이 자명한 이치며, 그 중에서도 학문이야말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없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고, 창의란 오로지 과거의 변형일 따름이라고 알아 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억해 온 ‘溫故而知新’의 뜻이고, 대학이야말로 과거에서 미래의 열쇠를 찾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전당일 것이다.

그런데 따를 ‘선생’은 없고 오직 도장을 손에 쥔 ‘교수’만 있는 대학, 깡그리 폐기 대상일 뿐인 과거를 가진 ‘구세대’만 있는 학계. 그 뒤엔 어떤 세상의 그림이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하기가 두렵다. 또 그런 대학에서 공부하고 성장한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에서는 삶 또는 학문 그리고 교육이란 것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것인가로 생각이 번지기도 한다. 무섭다.

김대행 서울대 명예교수ㆍ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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