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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영어강의, 어디까지 해야 하나?
대학의 영어강의, 어디까지 해야 하나?
  • 이철호 고려대
  • 승인 2011.05.30 13: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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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이철호 고려대 명예교수(식품공학)

                    

이철호 고려대 명예교수
1980년대 초에 유엔(UN)대학의 자문관 자격으로 미얀마(당시에는 버마)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에는 한국과 미얀마가 수교가 돼있지 않아 유엔 비자로 입국할 수 있었다. 유엔대학이 제공하는 국제간 대학생 교류 장학제도의 소개와 장학생 선발을 위한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였다. 랭군대학에서 대학의 관련 교수 2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유엔대학의 장학생 선발제도와 규정에 대한 설명을 했는데 회의가 끝날 때쯤 한 교수가 ‘한국의 대학에서는 강의를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별 생각 없이 ‘물론 우리말로 강의하고 외국의 원서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한글로 쓰인 교재를 사용한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거기에 모인 모든 교수들이 눈을 크게 뜨면서 한국이 그렇게 선진국이냐고 놀라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아시아에서는 자기 말과 글로 대학에서 강의하는 나라는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뿐이었다.

우리는 지난 일세기 동안 국권의 침탈과 전쟁 그리고 세계 최빈국의 어려운 시대를 거쳐 오면서 우리의 자긍심과 자신감을 너무나 많이 잃었다. 그래서 한국이 세계를 리드하는 국가가 되려면 이 심하게 상처받은 세대가 지나가야 한다고들 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패기에 찬 젊은 세대들을 보고 있다.

그런 마당에 지난 MB정권의 인수위원회가 영어 몰입교육을 거론할 때에는 온 국민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시대의 일부 엘리트 그룹들이 우리 것을 전혀 모르고 외국의 교육으로 빠르게 웃자라 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오늘 우리 대학에서 번지고 있는 영어 강의 열풍은 이러한 흐름의 여파로 나타난 것으로 보여 몹시 걱정스럽다.

세계 100대 대학 진입, SCI논문 몇 편을 가지고 대학의 발전을 가름하는 오늘 한국의 대학 문화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로 보인다. 대학의 국제화를 위해 외국학생들이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일부 기초 입문 과목은 영어로 강의되는 것도 좋아 보인다. 그러나 신임 교원에게 영어 강의를 필수로 요구하고 전 과목의 반 이상을 영어로 강의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것이 마치 일류 대학의 조건인 것처럼 집착하고 자랑하는 교육자가 있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세계의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영어권이 아닌 곳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대학에 취업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의 학문체계가 왜곡되고 편향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영어가 학술용어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영어가 라틴어에서 독립해 과학 학술용어로 자리를 잡기 위해 수세기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아직도 우리는 일부 학명을 라틴어로 표기하고 있다. 그만큼 언어는 함부로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다. 해방 후 우리는 각고의 노력으로 우리말로 과학기술 논문을 쓰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우리말을 발전시켰다. 통일이 돼 북한의 학술용어와 합치면 우리는 실로 진일보한 한국어로 발전시킬 수 있다.

일본인들이 국력에 비해 국제사회에서 활약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 언어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의 산업기술이 세계 최고수준이 된 것은 철저한 번역사업과 이를 통한 기술의 자기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세계 사람들이 일본어를 배우려고 몰려들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문에 의존하고 앞으로는 영어에 의존하는 한국이 된다면 우리의 장래는 희망이 없다.       

우리는 학문을 배우고 연구하기 위해 대학에 가는 것이지 영어를 배우려고 대학에 가는 것이 아니다. 영어를 잘해서 이 사회의 엘리트 그룹에 들어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영어를 잘하는 것은 우리 것을 발전시키고 키워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목표를 잃어버리고 수단을 목표를 착각해서는 안 된다.

교수로 임용될 때 영어로 강의하기로 약속한 관계로 외국인이 하나 없는 교실에서 영어로 강의하느라고 애쓰는 젊은 교수들을 보면 측은하기 그지없다. 그들이 우리말로 강의하다면 얼마나 시원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더 많은 비전을 학생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그리고 영어강의를 준비하는 엄청난 시간동안 더 많은 창의적인 연구를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너무나 크다. 영어로 강의하는 후배교수들에게 늘 당부하는 것은 용어의 뜻을 잘 가르쳐 주라는 것이다. 특히 우리말은 한문의 상형문자에 근원을 두므로 모든 용어가 그 속에 스스로 뜻을 가지고 있다. 기술 내용이 용어 자체에 들어있는 것이다. 이것을 영어 단어로 그냥 넘어가면 기술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 결국 기술의 자기화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나는 영어강의 열풍이 불기 이전에 이미 1995년부터 영어강의를 했다. 영어로 강의하게 된 동기는 우리의 전통음식, 간장, 된장, 김치, 젓갈에 대해 우리말로 강의하면 학생들의 흥미가 아주 떨어지는 것을 보고 영어로 강의하기 시작했다. 비교음식문화연구(Comparative dietary culture studies)라는 이름으로 정년하기까지 16년간 영어로 강의했다. 외국인 학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학기의 반은 학생들이 발표하는 시간을 가져 재미있는 강의가 되었다. 영어강의는 자생적으로 필요할 때 교수의 재량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지금처럼 억지로 하는 영어강의는 강의의 질을 떨어뜨리고 우리 학문의 뿌리를 훼손하는 역사적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철호 / 고려대 명예교수 식품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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