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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_ 경복궁 哀史
딸깍발이_ 경복궁 哀史
  • 교수신문
  • 승인 2011.04.1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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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우 편집기획위원 / 서강대 사학과
필자는 사학과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보다 실용적인 지식을 전달하지 못한다는 세간의 지적에 대해 순수학문의 정당성만을 방어하기에 급급했었다. 그러던 중 큰마음을 먹고 실용적 교과목이라는 취지에서 이번 학기에 ‘문화유산 영어해설’이라는 과목을 신설하고 서울의 여러 역사적 장소를 순회하며 현장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조선 왕조의 正宮이었던 경복궁이 정부의 복원사업 계획에 따라 제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던 세칭 중앙청의 철거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이를 철거하고 광화문 및 여러 전각의 위치가 고증에 따라 제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보니, 어찌됐던 잘한 일이라 싶었다. 실로 경복궁의 존재는 우리역사의 영욕을 그대로 간직한 산증인임을 다시금 깨닫게 됐다. 조선왕조에 대한 현대의 평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지만, 그 건국시기로 돌아가서 본다면 위대한 업적이었음에 틀림없고, 경복궁의 존재는 그 영광을 실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경복궁은 완전히 불타버리고, 19세기 후반 기울어진 왕조를 일으켜 보겠다는 대원군의 야심찬 기획에 의해 경복궁은 재건됐다. 그러나 마지막 왕이었던 고종은  일본인들의 위협을 피해 덕수궁 등으로 옮겨다녀야했으니, 한 왕조의 슬픈 몰락을 복원된 경복궁에서 다시 돌아보게 된다.

무엇보다 비통했던 역사는 바로 이 궁전 안의 건청궁에서 명성왕후가 일본정부의 비공식 테러단에 의해 무참히 刺殺되고 불태워졌던 일이다. 그 후 조선총독부가 이 자리에 세워지고, 의도적으로 전각들이 헐리고 경매돼 한 왕조의 정궁이 기껏해야 시민들이 산책하는 공원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세계사상 유례가 드문 야만적인 문화파괴 및 말살 행위였던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한 민족의 문화유산은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야 한다. 그러한 원칙에 맞추어 경복궁은 복원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경복궁 안팎에 있는 두 개의 건물이 이러한 원칙에 배치돼 있다. 그 하나는 궁내에 정체불명의 건축양식으로 수십년 전 지어져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그 이전계획이 잡혀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경복궁의 경관 및 역사적 의미를 크게 해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또 하나는 궁 뒤편에 있는 대통령 관저로서 그동안 여러 건물에 가리어 잘 드러나지 않았었다. 청자 빛 푸른 기와가 아름다운 청와대는 막상 정리되고 있는 경복궁에서 너무도 눈에 띠게 잘 보인다. 널리 알려진 대로 조선왕조의 수도 건설 및 궁궐 건축에는 당시의 이념이었던 유교와 풍수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배산임수의 위치에 서울을 정하고 북악산의 地氣를 받아내려 경복궁으로 흐르게 했고 모든 건물 및 가로의 배치는 유교의 철학적 내용을 면밀하게 반영했던 것이다. 그러한 종교나 믿음을 오늘날 고수하자는 뜻은 절대 없으나, 문화 유산의 상징성은 후손들에게 그대로 전달돼 그 뜻을 새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청와대는 본시 1930년대 조선총독의 관저로서 지어졌던 ‘경무대’였다. 아마도 조선왕조의 상징을 의도적으로 격하시키려는 일본인들의 또 다른 문화말살 행위였다. 해방 직후 경무대는 점령군으로 들어왔던 미군 사령부의 수반이었던 하지 장군의 숙소로 사용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 일지도 모른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다시 우리 대통령의 관저로 쓰이게 된 것도 가난한 신생국이라는 탓으로 돌릴 수 있겠다. 그러나 그 후 역대 대통령은 경무대를 ‘청와대’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심지어는 증축까지 해가면서 이곳에 ‘입성’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다. 경복궁 파괴와 함께 경무대의 위치는 우리 역사의 슬픔을 드러내는 곳인데도 말이다.

이는 우리 문화유산 중 에서도 상징성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는 경복궁의 역사적, 철학적 의미를 미처 생각해보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안보상 이유도 있다 하겠지만, 권위주의 군사정부 시대가 끝난 이즈음, 왜 세계 유수 국가의 대통령 관저들이 경호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시민들과 가까이 위치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경복궁을 돌아보는 한 역사가의 심정은 착잡했다.

 

임상우 편집기획위원 / 서강대ㆍ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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