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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일본인 교수가 본 韓日 대학
[딸깍발이] 일본인 교수가 본 韓日 대학
  • 최재목 편집기획위원 / 영남대·철학
  • 승인 2010.11.29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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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으로 요란할 즈음, 일본 한 국립대의 일본인 교수 R씨가 찾아왔다. 국제 학술대회에 발표할 논문을 준비 중인데 자료와 관련 내용의 자문이 좀 필요하다고 했다. 필요한 자료를 건네주고 저녁을 같이 하게 됐다. 그는 학기 중이지만 휴강을 하고 부산에 왔다가 대구를 거쳐 서울에 가서 사람을 좀 더 만난 뒤 귀국한단다.

대학 근처 식당에 들렀는데, 그는 매운 한국 음식을 좋아했다. 누구보다도 한국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 도중에 불쑥 “이제 일본은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혹시나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지 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게, 뭔 말인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일본사회는 더 이상 활력도 없고, 대학 또한 활기도 없어요.” “각자 조용히 자기 영역만 파고들다 보니, 좌충우돌할 일도 없고 남에게 신경을 쓸 필요도 없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것이 좋은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론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뭐랄까? 남과 부딪히더라도 좀 ‘파격적’인 논의가 나오면 좋은데, 그럴 것 같지 않네요.”

이런 저런 말을 듣고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일본의 학술은 그 나름의 노하우와 전통, 튼튼한 기반이 있지요. 치밀하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차근차근 아주 기초부터 쌓아 올라가죠. 그건 참 큰 장점입니다. 이에 비해 한국 학술은 아직도 그렇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통이 크게 보일지 몰라도 가끔 비약이 심하고 때론 대충하는 것들이 많아요.” “한국은 분명한 구체적 논의보다는 비교적 추상적·보편적이고, 규모가 큰 역동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반면 일본은 구체적·각론적이며, 세밀한 것들을 조용하고 차분하게 규명·정리해가기를 좋아하죠.” “일본사회는 자기 것만을 오래 깊이 추구해가는 사람을 인정합니다. 이것저것 종횡무진, 횡설수설 해대는 사람은 싫어하지요. 아니 그런 사람은 인정 못 받고 왕따 당하잖아요?” 그러자 그는 “아니 바로 한국의 횡설수설, 종횡무진 하는 그런 모험, 용기, 활력을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일본은 그렇게 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합니다.” 라고 말했다. ‘아, 그런가?’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최근 한국사회에는 ‘통합’이란 말이 유행하잖아요?” 그리고 “한국 분들은 바깥-정치에 민감합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늘 현실의 움직임에 깨어 있다는 말도 됩니다. 세상이 움직여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지식활동을 설계하는 습관이 꼭 나쁜 것은 아니죠. ‘학문은 학문’, ‘정치는 정치’라는 도식적 발언이 한편으론 맞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학문도 하나의 정치죠. 그런 문제의식의 선순환이 되지 못하도록 차단·분리해온 것이 일본사회였다면, 한국은 애당초 ‘학자’(지식인, 士)-‘관료’(정치인, 大夫)라는 유교적 틀 속에서 ‘학문’을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며 기민하게 자신의 길을 성찰?비판해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물론 일본처럼 ‘순수한’ 학문 지향을 논한다는 점에서는 한국은 보통 ‘이념적’ 학술이란 성향을 띄고 있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죠. 그러나 다른 면에서 한국에는 ‘순수’보다는 현실의 지평에 몸을 던져 ‘참여’한다는 건강한 ‘고뇌’가 살아있어요. 이런 고뇌의 정신을 일본은 이제 많이 배워야 합니다. 현실에 ‘참여한다’는 정신에서 건강한 이성이나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의식도 살아나지요.” “일본은 총체적 부도 직전에 와 있습니다. 너무 고요해 활력을 이끌어낼 動因이 없어요. 자력으로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고요.” “저는 매운 고추와 마늘을 잘 먹습니다. 한국사회, 한국인, 한국 학술이 보여주는 그런 ‘매운 맛’, ‘활력’은 어쩌면 사회나 학술이 진보해가는 방향에서 매력적인 발전 요인이 될 것으로 봅니다.”

대화를 하면서 솔직히 난 어느 게 ‘낫다.’ ‘못하다’는 판단을 보류하고 싶었다. 우리 대학들이 무언가에 골몰하고 있지만, 과연 대학에 활력·활기란 게 있는가. 남들이 한국에서 그렇게 찾고 싶어 하는 가치를 정작 우리 자신들은 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대학 학술의 진정한 견인차는 활력이다. 거기에 희망도 상상력도 고개를 든다.

최재목 편집기획위원 / 영남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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